[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평화 시위의 두 얼굴

‘평화’라는 덫에 스스로 빠져들어서 원래 일어났던 ‘변화’의 목적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광화문에 백날 모인들 이렇게 모이고 해산하는 것을 반복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폭력성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이었다면 과거의 민주화 운동은 모두 의미 없는 것이었나? 전 세계로부터 평화적 집회에 환호를 받은 지난 연말이었지만, 정작 한동안 꿈쩍도 않는 청와대를 목격한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평화 집회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광장에 모이는 것이, 저들에겐 또다시 광장에 나온 개, 돼지로 취급받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장기 집회의 힘도, 덕분에 보다 밀어붙일 수 있었던 야권의 힘도 모두 광장의 따뜻한 촛불 덕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 정치권이 그 촛불들을 ‘숭고한 국민의 뜻’이라며 받들 수 있었던 것도 평화 시위였기에 온 정당성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에 태어난, 정치적 효능감을 맛볼 수 없었던, 이제 막 민주주의의 맛을 아주 조금 본 우리 젊은 세대는 시민 운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을 드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평화는 폭력을 언제나 이기는 것일까.

돌멩이와 폭탄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

20세기 초반 영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 여성참정권 운동가, 2015)는 이러한 의문에 단호히 ‘아니’라고 답하며 시작한다. '여성들은 투표권을 주장하며 수십 년간 투쟁을 해 왔다. 그 주장은 묵살당했다. 이에 맞서 에밀리 팽크허스트는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며 ‘서프러제트’를 이끌었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어떤 법적 테두리도 없었던 시절, 혹사당하는 세탁소 직원들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하는 영화의 첫 마디다. '서프러제트'는 수십 년의 평화적 운동 후 그간의 활동이 기성 정치인에게는 그저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노선을 바꾼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창문에 돌을 던지고 때론 전화선을 폭파하면서 도시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인명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당부가 있긴 했지만 총리의 별장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영화는 그 방법만이 옳았다며 인물을 영웅화하거나 극적인 장치를 넣지 않는다. 아주 담담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그리려 애쓴다. 서프러제트가 여성 참정권 운동 역사의 오점이라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그들의 방향성이 테러리스트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프러제트 활동으로 인해 정치권은 여성 운동에 억지로라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남편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아내도, 아이를 키우는 것이 존재 목적인 엄마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남편들과 똑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폭력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대사가 그들의 심정을 말해 준다. 영화는 ‘Vote for Women’(여성에게 투표권을) 깃발을 흔들기 위해 자살하는 여성의 모습과 그 장례식의 실제 영상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thecultureconcept.com)

사회병리 현상을 미러링하다니. 메갈리아의 탄생

‘경고. 극중 사건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극심한, 그러나 그간 표면화되지 않았던 곳곳의 사건들이 영화를 통해 떠오르게 된다. 서프러제트는 종종 ‘메갈리아’와 비교된다. 메갈리아는 ‘이갈리아’와 ‘메르스 갤러리’의 합성어다. 이갈리아는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노르웨이 소설에서 왔는데, 이 이야기는 성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세계를 무대로 남자이기에 자신의 꿈을 접고 아이를 키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메갈리아가 자신들의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미러링’의 아이디어가 바로 이 소설에서 왔다. 메르스 갤러리는 지난 2015년에 유행한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커뮤니티로 시작했는데, 최초 의심 환자가 여성이며 격리조치를 무시하고 여행을 즐기고 온 탓에 한국에 메르스가 퍼졌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다. 해당 여성에 대한 비하가 확장되어 한국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며 커뮤니티가 들끓었는데, 알고 보니 기사는 오보였고 최초 확진자는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에 반성이 없자 여성 누리꾼들은 폭발하고야 만다. 그간 대중매체와 언론에서 접한 수많은 여성혐오성 발언, 인터넷 공간에서 공공연히 접해 온 조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들이 반대로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모인 집단, 여자 일베라 불리는 메갈리아의 시작이었다.

다음은 '혐오에 맞서는 혐오: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를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젠더 담론'(박무늬, 2016)이라는 석사 논문을 통째로 인용한 것이다. 메갈리아의 특징과 활동 목적은 다음과 같다.

“메갈리아 이용자들은 혐오적 정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그것을 유희화된 형태로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유희화된 혐오를 바탕으로 기존 사회가 부정적으로 규정했던 ‘김치녀’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재탄생시키면서 남성 중심적 가치들에 맞춰져 있던 기존의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를 타파하고자 한다. 패러디, 또는 되받아 쓰기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미러링’은 메갈리아의 가장 대표적인 전략으로, 이들에게 ‘여자 일베’라는 오명을 씌우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여성도 거칠고 불편한 발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기제가 되어 주기도 했다. 메갈리아 이용자들은 ‘한남충’, ‘애비충’ 등 한국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일부 남성들의 비합리적 행태와 가부장제의 모순점을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다수의 이용자가 20-30대 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부장의 억압을 덜 받아 온 80-90년대생 들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는 양성 평등하다’는 신화 속에서 자라왔으나 사실상 전혀 양성평등하지 않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깨닫고 분노한다.”

특정 지역, 정치권, 인물에 대한 모욕을 서슴지 않았던, 오히려 모욕이 그 집단의 목적으로 보이던 ‘일베’는 무시할 수 없는 회원 수와 과감한 행동 속에서 단순히 미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사회병리 현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여성은 장애인,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 일베의 대표적 혐오 대상이 되었던 하나의 ‘계층’이었다. 계층이라 함은, 특정 여성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한국의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일베의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는 이들의 방식을 거울로 비춰 똑같이 행동한다는 ‘미러링’을 시전하며, ‘김치녀’, ‘된장녀’의 대응어로 ‘한남충(한국남자벌레)’, 더 나아가 가부장적 남성 중심 문화의 핵심인 아버지 세대 남성들을 혐오하는 ‘애비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쯤만 해도 몹시 불편하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겠다는 방향성에도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데, 온갖 모욕성 단어로 남녀갈등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대체 양성평등에,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메갈리아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말투나 단어에 거부감이 든다 -> 그러라고 쓰는 것이다 / 한국 남자를 일반화하지 말자 ->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일베들의 일반화를 미러링하는 것이다 / 좀 더 성숙하게 논리적인 분위기를 만들자 -> 10년 넘게 그래 왔다. 돌아온 건 없었다 / 비판의 대상이 되는 남성들을 계몽할 수도 있지 않나 -> 우리는 혐오하고 공격하기 위한 집단이다.”

도덕적 문제에 정당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메갈의 정체성은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단체가 아니라 일베와 비견되는 혐오 전시를 거울 상으로 보여 줌으로써 그 에너지를 성차별 해소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 메갈리아 로고.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과정은 있고 목적은 사라진 혐오 운동

과연 혐오를 목격한 사람들로 인해 발생한 에너지가 성차별 해소의 방향으로 이끌어질까? 누군가는 메갈리아가 아닌 여성들이 메갈리아에게 빚을 졌다고 표현한다. 과거 여성들의 분노가 오늘날 여성에게 조금 더 편안한 삶을 내어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혐오는 다르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는 사회 운동에 대한 열정의 뿌리가 될 수는 있다. 서프러제트들은 분노했고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들은 이것보다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분노를 딛고 일어난 사회 운동이었다. 하지만 메갈리아는 혐오 운동에서 멈춘다. 그들의 양상은 종종 비혼주의, 비출산, 그리고 레즈비어니즘으로 이어진다. 한남충과의 결혼은 미래가 없다. 결혼하지 말자.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취급한다. 그러므로 아이 낳지 말자. 자신의 성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여성이라면 여자친구를 만나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다면 메갈리아가 원하는, 이상적으로 그리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이 혐오의 에너지가 성차별 해소의 방향으로 기울어질 것이라 순진하게 믿고, 그렇게 양성평등이 이뤄진 다음에는 해체하는 것이 메갈리아의 목적인가? 그들이 과거의 그 어떤 페미니즘에 비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으며, 여성 혐오 문제를 인식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프러제트와 같이, 분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운동가들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깃발이 없었다. ‘Vote for women’이라는 깃발을 펼치고자 승마장에 뛰어든 여성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페미니즘이란 오염된 단어다. 그 단어가 깨끗해지지 않는 한 페미니즘의 미래는 암담하다. 사회 운동은 더 많은 이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목소리가 되어야 끝내 승리한다. 일베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혐오를 옹호함으로써 오히려 메갈리아의 남성 혐오에 정당성을 주는 덫에 빠졌듯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모든 페미니즘을 조롱하고 비하할 이유를 준다.

‘혐오는 혐오를,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메릴 스트립의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이 전혀 상투적으로 들리지 않았던 요즘이었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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