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탄핵이 가결된 날, 많은 이들은 환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떤 이들은 분명 원통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국회의사당의 의원들의 표정은 대체로 무겁고 진중했다. 그날은 분명 즐겁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다시 끌어내린, 끌어내릴 수밖에 없음이 증명된 날이었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 우리의 지난 2012년의 선택은 왜 잘못된 것이었나. 이제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 거의 분명해졌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곧 쏟아져 나올 차기 대권주자들에 대한 보도를 접하기에 앞서 우리 나름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그 기준도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엘리트의 자질’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숙고는 어떤 사람이 이 나라의 대의제의 꼭대기에 있을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란 무엇인가? 가장 보편적인 ‘사회’란 국가 공동체다. 국가 공동체의 목적을 위해 구성원이 해야 하는 의무를 사회적 책임이라고 한다. 이 의무를 소극적으로 해석한 것이 법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보진 않는다. 사회구성원의 의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국가의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공동체의 목적은 무엇인가? 국가의 목적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또 어떤 정치 체제를 이상적으로 추구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책임의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국가 방위나 경제 교류에 있지 않다. 그보다 높은 차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이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고 시민 자치에 참여하는 것 모두가 정치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 모든 행위가 동시에 사회적 책임이 된다. 이에 반해 생명권과 재산권 보호를 국가의 목적으로 본 홉스의 국가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해 사회적 책임의 범위가 좁다. 그에게 국가는 필요악이요, 군주는 공동의 평화를 위해 다수의 힘과 수단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이때 군주의 사회적 책임은 국가를 존속시키기 위해 자신에게만 있는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고 주권이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이다.

▲ 여야 차기 대선 주자들. (이미지 출처 = YTN뉴스 동영상 갈무리)

국가의 형태나 제도에 따라 사회적 책임이 달라진다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책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정치 엘리트, 또 자본주의 체제의 큰손인 경제 엘리트의 사회적 책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의무와 홉스의 군주의 책임을 모두 갖는다. 시민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여 공동체를 선을 향해, 보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내일로 끌고 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엘리트는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공적 자리를 이용해 이익을 사유화하고 그들끼리 이익을 나눠 가진다. 그 파이를 더 크게 베어 물기 위해 엘리트 진입장벽을 높이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공고히 한다. 재벌과 대기업은 공동체의 번영에 관심이 없다. 정경의 유착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군주 집단을 만들어버렸는데 정작 공동체의 인격 역할을 해야 하는 군주는 나머지 몸통의 건강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 엘리트는 대중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다. 정치는 부의 재분배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 엘리트에게도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엘리트의 자질과 상관없이 혈통 등에 따라 속적으로 엘리트가 되었다면 현대에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국가의 미덕을 가장 잘 실현할 엘리트를 뽑는 대중에게도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낮은 참여율은 시민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한 반성과 함께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가 깊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엘리트의 자질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좋은 리더란 좋은 삶을 위해 결사체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다. 즉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 공동선을 고민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 정치적 인정과 영향력을 크게 가질 가치가 있는 사람이 엘리트의 자격이 있다. 시민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대중이 인정해 준다면 이는 동시에 좋은 국가의 교육적 본보기를 얻을 수 있다.

현대의 특징은 교육과 기술의 발달로 대중의 수준이 크게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지적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으며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의 질과 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엘리트는 더 이상 자신이 과거의 엘리트가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중 또한 엘리트와 대중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대중이자 엘리트로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숙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 모든 시민의 사회적 책임이 될 것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정이 진정 민주적이기 위해서는, 단지 투표에서 나타나는 선호도의 총합이 아니라 실질적인 숙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사회 경제적 지위나 능력의 차이 속에서도 모든 시민이 의사결정자로서 주의 깊은 심의와 토론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도록 장애물이 되는 권위주의, 가부장제도 같은 낡은 문화를 타파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시대의 리더가 돼야 한다. 리더가 될 수 없는 사람을 끌어내린 우리는 충분히 리더다운 리더를 배출해 낼 역량이 있다. 길게는 8개월, 그 끝에 선택될 ‘좋은 삶에 대해 고민하는 리더’를 기대한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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