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이 시국에 여성문제를 말하면 눈치 없는 사람인가?

‘강남 아줌마’나 ‘무당년’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불편하다. 온 국민이 부패한 박근혜 정권에 맞서 하나되는 이 시국에, 무의식적으로 퍼져 나가는 차별적 언어에 불편해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일까? 여기서 여성문제를 운운하는 것은 덜떨어진 페미니즘일까?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가 세상에 알려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중앙일보>에서 ‘여성리더십의 약점’이라는 칼럼이 나왔다. 이 글을 쓴 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비선 측근에게 권력을 나눠 준 것이 여성의 정서적 리더십이라는 약점 때문이라며 대통령이 여성인 것을 이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들었다. 박 대통령 전, 역대 대통령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측근비리가 ‘남성’이기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던가? 그래서 역시 남자는 안 돼, 라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지금의 국정 농단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왜 일어났는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보지 않으려 했던 우리나라의 문제를 모두 보고야 말았다. 평등한 나라, 자격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마땅한 자리를 누릴 수 있고 그래서 성실한 오늘이 더 나은 내일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 우리가 꿈꿨던 소박한 바람이 현실에선 어림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그래서 거리로 나왔다. 단순히 분노하고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더 나은 내일을 끌고 오자. 그러니까 더 이상 대통령 자격 없는 박근혜는 하야하라. 희망과 함께 외친 것이었다. 때문에 우리의 표현의 자유로써 정의를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깨부수고자 하는 부정의를 오히려 양성한다면 수많은 촛불은 큰 의미를 잃고 만다. 이 촛불의 끝에 정권 퇴진이 있고 죄인에 대한 합당한 법적 처벌이 있더라도, ‘역시 여자는 안 돼’, ‘아줌마 주제에’라는 여성 혐오의 경험이 남아 버린다면 우리는 앞으로 그것을 깨기 위해 또 촛불을 들고 대자보를 걸고 수없이 소리 내어 외쳐야 할 것이다.

왜 ‘아줌마’가 문제고 ‘여자’ 대통령이 문제인가?

이 국정 농단 사태는 그들이 여자인 것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다. 여자여서 측근비리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여자여서 사사로운 탐욕으로 정당성 없는 권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정치 윤리 결여, 무지, 무능 등 개인 역량의 문제고 이 역량의 부족도 그가 여자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번 사태를 굳이 여성과 연관시키며 여성 리더십을 운운할까? 왜 박근혜 대통령이 여자라는 점이 부각되는가? 그것은 ‘여자 대통령’ 자체가 정치인이라는 사회적 지위 및 역할에 전통적으로 기대되는 성 역할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때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이 훨씬 크게 부각된다. 그리고 부정적 수행 결과의 눈에 띄는 요인이 된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여성 종사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간호사의 경우, ‘여자’ 간호사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남자’ 간호사라는 말이 쓰인다. 또한 직무 수행 과정에서도 그가 남자라는 점이 부각된다. 만일 그 남자 간호사가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의 개인적인 역량이나 다른 배경을 생각하기보다는 곧바로 ‘역시 남자는 간호사 일에 잘 맞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사회가 지금껏 기대하고 요구해 온 성 역할을 거스른 자리에서는 그 사람의 성이 부각되며 평가 기준이 되기 쉽다. 그러나 이는 고정관념의 결과일 뿐 실제로 합리적인 추론이 아니다.

▲ TV 광고에 나온 '새누리당 기호 1 준비된 여성 대통령 박근혜' 중 한 장면. (이미지 출처 = blog.naver.com/andre777/140175301829)

여성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역량 중 하나는 집단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이끄는 리더십이다.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 구성원들을 이끌어 나가는 자리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것이었다. 때문에 남자 간호사와 같은 논리로, 여성이 리더가 된 순간 ‘여성’ 리더십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여성 리더십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먼저 젠더(gender)와 섹스(sex)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섹스가 생물학적인 성을 일컫는 말이라면 젠더는 사회 문화적 성을 말한다. 섹스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면 젠더는 그 사회가 요구하고 형성해 온 남성과 여성의 차이, 많은 경우 차별을 나타낼 수 있는 개념이다. 왜 젠더라는 개념이 생겼는가? 생물학적 차이가 고정관념이나 권력에 의해 사회적 차이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사회는 특정 성에 부합되는 젠더의 특징이 있다는 믿음으로 사회 구성원을 그 방향으로 사회화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다움, 여성다움의 대부분은 사회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특질이다.

여성의 리더십, 여성다운 리더십이라는 개념에는 사회에서 길들여 온 여성다움이 내포되어 있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강압적이기보다는 타협적이고 반대로 강단 있기 보다는 우유부단하고, 전통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해 온 남성에 비해 책임감이 떨어지고, 판단력도 부족한 리더의 성향을 여성 리더십이라 일컬어 왔다. 즉 여성 리더십의 여성은 생물학적 특징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고정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유의미하게 다른 여성 리더십이란 없다. 부드럽고 섬세한 리더, 카리스마 있고 추진력 있는 리더 등 다양한 종류의 리더들이 있지만 여성 리더, 남성 리더에 일관적으로 부합하는 리더상은 없다. 그것은 사회적 허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왜 ‘여성’ 정치인이 필요한가?

생물학적 차이를 넘어서 젠더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재생산된다. 그 사회의 기대와 요구가 허구적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에 힘입어 또 다시 허상이 재생산된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을 깨는 ‘경험’이다. 대부분의 고정관념은 ‘휴리스틱’의 결과다. 휴리스틱(heuristics)이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사용하는 어림짐작의 기술로 인간의 본성이다. 이 인지의 지름길은 개인적, 사회적 경험에 의해 설계된다. 대통령 하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간 우리 사회는 여성 정치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남성 정치인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불필요한 구분을 하지 말라면서 왜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단순히 과거의 피해에 대한 보상적 의미로 할당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여성이 드물었던 지위, 그래서 ‘남성다움’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던 자리에 더욱 많은 여성이 진출해야 고정관념의 재생산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는 두 인물이 여성인 것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사회 여성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됐다. 젠더 고정관념을 극복해 나가는 과도기에 이처럼 영향력이 크고 부정적인 사례는 우리 사회 전체의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 여성 정치인, 리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할 것이다. 여성의 탓이 아니지만 여성의 탓으로 인식됐고 앞으로 이 경험을 덧댈 좋은 사례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지 않는 한, 사건의 당사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성을 운운하는 시각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례가 필요하다. 그 사례들로 하여금 더 이상 전통적인 성 역할 기대가 유효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여성’ 정치인이 필요 없어질 것이다. 자신의 성과 상관없이 마땅한 능력을 갖춘 이가 합당한 자리에 앉을 때,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고정관념에 붙잡혀 싸워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이 그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