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때가 되어서 그런지 고해성사와 관련된 질문이 또 들어왔네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전에도 한 번 다뤄 본 적이 있습니다(“전화로 고해성사 할 수 있나요?”를 더불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질문에 대해 여전히 교회법상의 답을 드리자면, “안 된다”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것, 즉 하느님과 사람이 실제로 만나는 일에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대리인인 사제를 만남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고민 상담을 위해서라면 전화든 화상통화든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을 좀 더 잘 체험할 수 있는 성사를 원하신다면, 고해소로 나오시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일단 고해성사가 이뤄지는 본래의 장소는 성당이나 경당입니다. 종종 고해성사가 성당이 아니라 기타의 장소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지 사제는 고백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공간에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바티칸의 교황궁 발코니에서 전 세계 신자들을 향해 강복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느끼는 신자들이 생겨나는 마당에, 화상통화를 하면서 고해성사를 못 해 줄 건 뭐냐 하는 문제제기는 나름대로 정당해 보입니다.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내 앞에 사제가 보이기에 마치 면담식 고백성사 같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문명의 이기까지 이용해서 고해를 하고 싶다는 분들은 도대체 어떤 것을 기대하는 걸까요? 솔직히 대부분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편히 생각하지 않기에 더욱 명암이 뚜렷합니다.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듯이, 우선 그런 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시간을 두고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털어놓고 싶은 사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 사람들과의 관계, 삶의 의미 등 결국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신자분들이 고백소에서 사제를 붙들고 여유 있게 면담식 고해를 하기는 상당히 힘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이 아는 사제가 없는 것도 그렇고, 현실적 상황은 보통 미사 직전이든지 판공 때문에 대기열이 길게 늘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 외국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전화나 화상통화 고해를 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BERLINER KURIER)

반면에, 매우 실제적인 이유로 전화나 화상통화 고해를 하고 싶어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분들입니다. 소통의 어려움이 결국 내적인 갑갑증을 낳기 때문입니다. 혹시 타지에서 살면서 언어 문제로 자기가 나누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신자분들은 고해를 우리말로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셨던 적 없나요? 설령 언어가 뒷받침된다고 해도 고해는 여전히 부담스런 성사인데도 말입니다.

말이 안 통할 때는, 고해소에 들어가서 '나는 외국인이다', '소통이 쉽지 않다', '내가 범한 오류는 이런저런 것이다'라고 간단히 말하면, 칸막이 너머에 있는 사제가 쉬운 단어 몇 개 말하고 사죄경을 바칠 것입니다. 내가 범한 이런저런 과오 중에서 잘 모르는 단어는 미리 사전을 검색해서 준비해 두시는 센스가 필요합니다. 외국에서 생활하시는 신자분들은 그렇게라도 간단히 고해성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담이지만, 옛날에 오지로 선교를 떠났던 선교사들은 원주민들과 말이 잘 안 통하는데도 고해성사를 줘야 했기에, 10계명을 근거로 번호가 붙여진 죄목 리스트를 현지어로 만들어 놓고 고해소 안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번호를 말하라고 했답니다. 소소한 대화를 할 상태가 안 되었기에, 고백하는 이가 부르는 번호를 듣고, 보속을 주고, 사죄경을 바치는 식으로 초간단 고해성사를 진행한 것입니다.

번역이나 통역 앱을 활용할 수 있는 요즘에는 그 정도로 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곳은 없겠지만, 고해성사 중에 내적인 이야기를 넉넉히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충족되지 않은 마음의 아쉬움은 신뢰할 만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믿음직한 누군가에게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고해를 통해 오는 평화와 위로를 일정 부분 주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준고해성사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우정을 나누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느님도 들으실 테니까요.

결코 쉽게 바뀔 리는 없다고 봅니다만, 과학기술의 실용적인 적용과 지속적인 발달은 언젠가 고해성사의 새로운 국면을 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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