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어느 날 저녁에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짧은 인사말 다음에 이어진 질문은 전화상으로 고해성사가 가능하냐는 것이었습니다. 답은 속풀이의 독자들께서도 예상하시겠지만, 전화나 이메일 등을 통한 고해성사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전화나 이메일로도 한 개인의 잘못을 '고백'할 수 있는데 그러면 고해성사도 가능하지 않은가 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그건 그냥 고백이지 성사로서 고해성사는 아니라 하겠습니다.

▲ 이탈리아 여인의 고해성사, 카를 브률로프 1830년 作
고해성사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것, 즉 하느님과 사람이 실제로 만나는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에 대해 참회하는 어떤 이가 그냥 자기 방 안에서 '하느님 저는 이런 저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고백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전을 찾게 되는 인간적 본능을 존중한 성사라는 것입니다.

인간적 본능이라는 것은 쉽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사연을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둔 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무거운 사연이 있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크면 클수록 고백은 더 필요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가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연스럽게 성전을 찾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든 성모님이 안고 계신 아기 예수께든 혹은 성모님께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면서 자신의 속사정을 조용히 고백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한 고백이 아닌 성사로 인정되는 고해성사의 물리적 장소를 성당이나 경당으로 정해두고 있습니다(교회법 964조 참조). 고해소의 물리적 구조는 참회자와 고해 사제 사이에 고정된 칸막이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지만, 요즘에는 전통적인 고해소와는 달리 참회자와 고해 사제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는 면담식 고해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고해소는 얼굴을 가린 채 이루어짐으로써 익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다거나 영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은 쉽게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방식보다 새로운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참회자가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방법이 존중되어야 하며 고해 사제에게는 전통적인 고해소든 새로운 형태의 고해 장소든 상관없이 참회자가 하느님의 용서를 느끼고 위로를 받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게 된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실제로 사람을 통해 전달되어 오며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의 아픔과 부족함을 정성껏 들어주는 이, 내 마음에 대해 따스하게 공감해 주는 이, 볼에 입 맞춰 주고, 머리에 안수해 주며, 안아 주고, 손잡아 주는 이가 바로 하느님의 대리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게 해주는 고해 사제가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주변에 그런 이유로 선호하는 사제가 있다면 고해성사가 껄끄러운 것이기보다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만남과 화해의 체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서 그 순간 하느님의 사람인 사제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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