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42]

지난 주말(10월 22일) 일 때문에 만나게 된 분의 이야기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일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그분이 냉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늘 인터뷰 대상자를 찾아 헤매는 입장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해서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한 시간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세를 몰아 그분의 사정을 내 글에 소개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이제부터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한다.

그는 50대 중반의 남성이고, 대구에서 태어났다. 결혼해 장성한 자녀 둘을 두고 있다. 현재 인터넷 관련 소규모 사업장의 CEO이고 서울에 살고 있다.

그는 집이 대구교구청 근처여서 어릴 적부터 교구청 마당과 근처 성당을 놀이터 삼아 놀며 자랐다. 그럼에도 그는 중학교 때까지 성당엔 관심이 없었다. 갑자기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성당에 다니고 싶어진 것이다. 해서 영세 직전까지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교리반에 나갔다. 그런데 때가 아니었는지 수녀님이 가르쳐 주는 교리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은 그가 “하느님을 믿는데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하느님은 믿지 않는데 선한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천국에 가느냐?”같은 질문을 했는데, 수녀님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악한 일을 해도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답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수녀님이 그리 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부정적인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는데, 마침 수녀님의 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터.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첫 영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뒤 대구 소재 대학에 들어갔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남들 다 하는 대로 고만고만한 일을 하다 결혼을 하였다. 삼십대 중반인 1997년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하던 일이 계속 안돼 모두 접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에게 서울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놀란 건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대구 사람임을 알게 되면 그리 대구 욕을 해 대는 것이었다. 대구에 살 때는 들어보지 못했던 욕을 자주 듣다 보니 사람들이 야속하고 서울에 온 일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친한 사람들이 이리 말하는 걸 보면 다른 까닭이 있겠다 싶어 그들이 욕하는 이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책도 사 보고, 5.18을 겪은 이들에게 당시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처음 자신이 크게 잘못 살아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역사공부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상경을 하긴 했으나 일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유일한 낙은 평소 관심이 많았고 조예가 깊었던 클래식 음악을 듣고, 이런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합창단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합창단 활동을 하다 자연스레 가톨릭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머잖아 매료되었다. 이것이 가톨릭교회에 두 번째로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사는 게 고달파 어딘가 기대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해서 아내와 같이 2011년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고 다음 해에 영세를 받았다.

이후 2년 동안 아내와 함께 다른 활동은 안 했어도 주일 미사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다. 신부님 강론도 좋아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출신이 아니셨음에도 강론 중에 사회적 발언을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정치관이 바뀐 터라 신부님 강론이 더 잘 들어왔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절도 이 년 만에 끝이 났다. 신부님이 강론을 하실 때 나이 든 신자들이 궁시렁 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진 것이다. 마침 성당에 큰 공사가 있어 안 하던 돈 이야기도 자주 나왔다. 살림이 어려울 때이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도 계속되는 돈 이야기에 움츠러들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정 추기경의 발언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과 대비되는 그의 몰역사적 의식이 가뜩이나 흔들리는 그의 신앙을 더 흔들어 놓았다. 해서 같은 생각이었던 아내와 함께 신앙 생활을 중단하였다.

▲ 그는 신앙 생활을 중단하다가, 성당에 안 나가는 대신 시위 현장이나 시국 사건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 지금여기 자료사진)

그 이후로 그는 성당에 안 나가는 대신, 시위 현장이나 시국 사건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때는 인터넷 언론사를 차려 반정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저항이 필요한 곳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이렇게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길 위에 서 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미소 지었다. 대구에서 대학생활 할 때는 그도 여느 대구 사람들처럼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비난했다. 대구를 떠나올 때까지 그는 보통 대구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경하면서 많은 것에 새롭게 눈을 떴다.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이긴 하지만 서울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이런 세상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삶의 터전이 바뀌며 인생도 바뀐 사람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내가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영영 교회를 떠나신 건가요?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러자 그가 답했다.“아닙니다. 전 교회음악과 전례를 좋아해서 다시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의 서울대교구장이 바뀌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가 바뀔 때까지 지금처럼 부지런히 현장이나 쫓아다니렵니다.”

대수천 회원들이 들으면 놀랄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사제들 때문에 냉담자가 생긴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런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오늘의 사례에 등장하는 신자처럼 교회 지도자들의 보수적 행보, 신자들의 보수화에 불만을 품고 신앙생활을 멈추는 경우들도 제법 있다.

내가 기억하는 사례는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해 한동안 계속된 진보적 청년신자들의 탈 교회 러시(rush)다. 이 시기에 다수의 청년,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 교회가 갑자기 보수화되었다고 실망을 표시하며 교회를 떠났다. 물론 교회가 갑자기 보수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은 맞다. 그러나 늘 진보적이었는데 갑자기 보수화되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교회는 역사상 대부분 국가와의 관계에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교회에서 짧은 시간(196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보여 주었던 모습이 오히려 낯선 일이다. 이것은 교회가 매 시기마다 보여 주는 모습에 따라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 준다.

젊은이들이 실망해 한참 떠나던 그때만 해도 다수의 신자들은 사회참여를 지지했다. 이때의 신자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그 이전 시기 교회의 사회참여에 호의적 태도를 갖고 입교한 이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후 이십여 년 가까이 교회의 사회참여가 둔화되고, 이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고령 인구들의 입교 러시가 계속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요즘과 같이 사회참여를 싫어하는 신자들이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냉담의 증가는 교회의 사회참여 때문이기보다 교회의 보수화 탓일 가능성이 크다.

흥미롭게도 이때 탈출 러시에 동참했던 신자들 덕에 한국의 시민사회는 크게 성장하는 계기를 맞는다. 이들이 NGO 태동과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던 까닭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한국교회가 쇄신되었을까? 차라리 그들이 떠난 게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해 더 잘된 일 아닐까? 오늘의 사례는 새삼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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