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9]

추석 연휴 토요일 저녁에 있었던 소속 연구단체 컬로퀴엄에서 내 발표를 듣고 청중 가운데 한 분이 보내 주신 이메일 내용이다. 아직 냉담의 해법을 찾을 단계가 아니어서 계속 미루고 있는데, 이 분이 나름 원인이자 해법 두 가지를 제안해 주시는 통에 근본적이진 않지만 몇 마디 의견을 보태야 할 것 같다. 성의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너그러이 답례로 받아 주시기 바란다. 

무엇보다 내가 요즘 한편 기쁘고 다른 한편 당혹스러운 일은 과거와 달리 이 분처럼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표현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날 컬로퀴엄에서도 많은 신자 분들이 교회에 대한 질타를 쏟아냈다. 한마디로 “내가 가만히 있다고 아무 생각이 없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 분들의 질타 안에 교회에 대한 사랑, 안타까움이 녹아 있었던 터라, 이런 분들마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새삼 신학자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우선 편지 내용을 소개하고, 말미에 간단한 나의 생각을 보태 보겠다.

저는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 제 수업에 관해 의견을 써 달라 하면 제 수업의 민낯을 보게 되고 아이들의 눈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데 놀랍니다.... 가톨릭 신자는 왜 냉담할까요? 제가 아는 아주 마음씨 좋은 이종사촌 언니와 개신교에서 알게 되었고 고등학생들에게 논술을 지도한 적이 있다는 50대 여성 두 분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겨간 분들입니다. 한 분은 부산, 한 분은 일산에 사십니다.

두 분의 일치되는 말씀은 미사 시간에 신부님 강론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초기 신자 시절부터 한참이 될 때까지 미사 참례가 매우 지루한 일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죠. 미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릴 때가 많았고 분심이 끝도 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당에 꽤 오래 안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답이 많았지요? 네. 사람들은 일요일에 성당에 와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의 강론에서는 그것들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청주, 부산 등 여러 곳에서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신부님들의 강론도 참으로 재미있었고 의미 있었으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신부님들의 강론이 실망스러웠습니다. 미사에서 위로와 힘을 얻지 못하고 의미도 느끼지 못하면 미사는 지루함 그 자체입니다.

신부님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과 세상, 현실 등의 재료가 주어지면 그것을 잘 요리해 신자들에게 맛보게 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냉담의 가장 큰 원인은 신부님들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생은 재미없는 수업이어도 짜인 교육 과정이라 수동적으로 따르겠지만 대학생이라면 수강 신청을 하지 않겠지요? 신자 냉담은 학과목 수강 거부나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물론 신앙의 핵심은 구원이고 신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길을 안내하는 사목자의 역할도 참으로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부님들의 강론에 실망하여 아는 동료 교사가 다니는 개신교회에 몇 번 나가 본 적이 있습니다. 일산과 파주 경계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몇 번 되지 않지만 목사님 설교에 감동하고 삶의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개신교 다니는 동료들은 “그 교회는 말씀이 좋잖아!” 이렇게들 이야기하더군요.

세례 후 1년 정도 된 자매님의 질문에 박사님께서는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고 하셨어요. 영성 훈련,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시스템을 통해 기본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신부님들의 강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사는 성당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자라도 가장 효율적으로 영성 훈련을 받을 수 있고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일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 잘 다져진 뒤에 개인적으로든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든 신앙이 더 다져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말씀드리는데, 진정한 목자가 되기 위해 신부님들은 공부를 많이 하셔야 하고 책도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사목 활동에 대해 신부님들끼리 자주 토론하시고 신자들과 의사소통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습니다. 신자들이 왜 냉담하는지 아셔야 냉담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선교는 신부님들의 강론이라 확신합니다. 선교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분도 신부님이고 선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분도 신부님이라 생각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의 바탕 위에 일반 신자들의 신앙 목표도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냉담의 두 번째 이유로는 성당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구약, 신약이 함께 있는 두꺼운 성경책을 가지고 미사에 참례합니다. 내 성경책이니 읽기 좋고 밑줄도 그을 수 있어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하니 말씀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성경은 주님으로부터의 연애편지라고. 성당 앞쪽 전광판에 성가는 몇 장이라고 나오지만 그날의 성경 말씀은 안내가 없습니다. 그것부터 가톨릭 신자가 말씀을 모르게 하는 시스템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성경책을 가지고 방학 중 평일 미사에 참여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오늘의 말씀인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례력에 나와 있죠. 전례력을 안 보고도 언제든 성당미사에 참여하면 오늘 말씀이 어느 부분인지 알아야 성경책을 갖고 다닐 수 있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를 이어 주는 성경책을 가톨릭은 너무나 방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평일 미사에 참여할 때 오늘 말씀이 어느 부분인지 찾을 수 없다면 미사보를 쓰고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알맹이 없는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사보를 잘 쓰지 않게 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늘 가지고 다니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연애편지 책이 손에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성당을 더 쉽게 떠나지 않나 싶습니다. ○○동 성당을 잠시 다닌 적이 있는데 독서시간에 전 신자가 그날의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듣기만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정말 작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고 귀로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말씀의 의미가 가장 효과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고 생각됩니다. 독서자가 읽는 것을 듣기만 할 때 그 말씀은 듣는 동안 집중도 어렵거니와 독서자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리는 느낌입니다. 평범한 신자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말씀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전례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냉담은 가톨릭교회가 냉담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강력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례받은 신자가 미사에 참여하면 신부님의 훌륭한 강론을 들을 수 있고, 미사에 참여하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고, 그래서 계속 가고 싶다, 성경책 속에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내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 길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시스템이 미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서없이 너무 길게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소통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2016년 9월 18일)

▲ 강론 맡은 신부.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우선 장문의 편지를 써 주시고, 정보 공개에도 기꺼이 동의해 주신 자매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렇게 독자, 청중들과 함께 이 칼럼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 행복하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린다.

1. 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자매님의 생각에 동의한다. 현재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분들의 대부분은 일주일에 딱 한 번 주일미사에 나오시는 경우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분들도 제법 되지만 그래도 다수는 주 1회 참례하시는 걸로 추정된다. 이런 분은 주중에 본당에서 진행하는 교육들에 참여하기 어렵다. 이분들에겐 미사가 거의 유일한 교회 행사 참여이자 활동이며 교육이다.

일전에 교회잡지에 ‘신자 재교육’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면서 나도 이 자매님과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본당에 새로 많은 교육 프로그램들을 신설하는 일도 좋지만 가장 많은 신자가 참여하고 또 일주일에 유일하게 성당에 참여하는 행사이니만큼 강론처럼 좋은 교육 기회가 없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렇다. 많은 신자 분들에게 강론은 일주일에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아니 들을 수 있는 복음이다. 그러니 강론은 신자 분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만일 이 시간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이 자매님처럼 새롭게 일주일을 살 힘을 얻지도, 마음의 평화도 얻지 못한다. 이런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면 이는 신자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정신 건강에도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나는 이런 글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신자 분들의 소망이 너무 소박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거창한 교육이나 프로그램을 바라지 않고, 일주일에 십 분에서 십오 분 진행하는 그 시간만이라도 좋으면 그걸로 만족하다고 생각하시니 말이다. 나는 신자들의 이렇게 소박한 소망을 이뤄 줄 수 없을 만큼 한국교회의 사제들이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제가 냉담의 주범이라 하는 주장에도 썩 동의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사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소박한 신자들은 사제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해서 존경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기본적인 임무를 충실히 하면, 그것만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한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말과 같은 내용들이 교회 안에서 자주 들리면 사제들이 기본 임무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믿게 된다.

교회 쇄신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저 제 임무를 충실히 하고, 신자들이 사제와 교회에 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먼저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해 주면 될 터이다. 이년 전 "복음의 기쁨" 135-159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론, 강론 준비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은 적이 있다. 소감은 아주 단순했다. “왜 이리 지당한 말씀을 하시지? 이 정도면 요즘 쓰는 말로 깨알 같은 잔소린데.” 보통 당연한 일을 잘 하지 않을 때 잔소리를 하거나 듣는다. 그만큼 한국교회뿐 아니라 다른 나라 교회들에서도 사제들이 당연한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 터.

2. 자매님은 두 번째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는 신자들의 문제, 또 이를 문제시하지 않고 방치하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공감이 가는 지적이다.

나는 가끔 신자들이 성경을 몰라 좋은 점도 있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개신교계 신흥 종파들은 신자들에게 성경공부를 많이 시켜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는 데 활용한다. 따라서 어설프게 알고 있으면 이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다. 다행히도 가톨릭 신자들은 아는 게 없어 이들이 설파하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이단 종파에 넘어갈 위험이 적다. 대충 이런 식이다.

물론 농담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신자 분들이 많으시니 말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보면 이런 분들이 소수라는 느낌이다. 여전히 많은 분들은 혼자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인데 혼자서 렉시오 디비나를 하고 계실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지난 이십여 년간 교회에서 활발하게 성경 읽기와 쓰기, 성경 공부 교재 편찬 노력 등을 꾸준히 해 온 것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않은 성과다.

이 자매님은 개인적 노력이 따라야 하지만 시스템이 그리 갖춰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평가하신다. 좋은 의견이다. 본래 복음 말씀은 전례에서 듣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신자 분들이 앉아서 딴 생각들을 하시는 통에 신자들과 같이 읽는 방법을 쓰게 된다. 개신교에서는 목사님이 성경을 봉독할 때 스크린에 복음을 띄워 놓기도 하고.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신자들이 미사 중에 정신을 차리고 듣는 것이다. 평소 신앙을 높은 우선순위에 두고, 성경을 자주 읽고 성경을 통해 기도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하기 쉽지 않으니 신자들에게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체계도 갖춰야 한다. 입문 과정, 신자 재교육 과정에 이를 돕는 내용과 방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제들은 신자들이 이렇게 말은 하면서 정작 프로그램을 마련하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사실 이 말도 맞다. 나는 교회 안에서 여러 조사에 참여도 하고 주관도 하는데, 그때마다 발견하는 흥미로운 사실은 신자 분들이 ‘제안은 하지만 참여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분들의 의견을 반영해 무엇을 해 보려는 것인데, 정작 응답자들은 막연하게 ‘그리하면 좋겠다는 것이지, 내가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로 이해한다.

이런 사정이라 설문 결과를 믿고 프로그램을 개설하면 정작 나타나는 신자들은 교육이 그리 필요하지 않은 그야말로 본당 신부님과 의리로 나오는 소수인 경우가 많다. 사제가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겪으면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는 신자들을 못 믿게 된다. 이런 사정도 분명히 존재하니 사제들만 나무랄 수 없다.

그럼에도 사제들에게 더 많은 권위와 권한이 있으니 사제가 더 많은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이 신자들의 생각이다. 답답하지만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세세하게 제안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해 말을 아끼려 한다. 독자 분들이 저를 대신해 좋은 대안들을 제안해 주시기 바란다.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이제까지 읽어 보셔서 아시지만 내가 접촉할 수 있는 분들의 범위가 한정돼 있다. 마치 가톨릭 신자들은 다 이런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해 드릴까 두렵다. 정작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할 대상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층에 속한 분들을 만나고 싶어 드리는 말씀이다. 부디 소개를 부탁드린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