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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앙생활 중인 냉담자[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41]
박문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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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21  11: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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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독자께서 보내 온 사연이 있어 이번에는 이 주제를 다뤄 보려 한다. 사연을 보내 준 분은 30대 초반의 남성이고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본래는 더 긴 글이었는데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과 신상이 드러날 수 있는 단서들을 지우다 보니 지금의 길이가 되었다. 일부 문장은 가독성을 고려해 뜻을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손 보았음을 밝힌다. 이 독자분의 관심과 정성, 그리고 이 글을 싣도록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어린 나이에 세례를 받았던 저는 언제나 성당 밑에서 놀 정도로 믿음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어머니께서 냉담 중이셨음에도 혼자 열심히 성당에 나갔습니다. 주일학교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고 중, 고등학교 때는 예비신학생 모임에 꾸준히 참여할 정도로 사제의 꿈도 키워 보았으며, 재수 때와 대학교 1학년 때는 수도회 성소모임에 나가며 빨리 입회하라는 제안까지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른바 종교에 열정적이었던 제가 다소 냉정해진 것은 바로 다음의 사건이 터지면서부터입니다. 저는 재수 때 청년회에 가입하였습니다. 교사회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재수하면서 교사하는 일이 쉽지 않기에 그나마 덜 힘든 청년회에 가입, 성당 봉사를 조금씩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당시 저보다 일곱 살 많았던 청년회장은 저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며 제게 많은 일을 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년회 전례분과장이라는 자리가 재수생이자 스무 살인 저에게 돌아왔고, 레지오 마리애에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청년 레지오에도 가입을 시켰습니다. 심지어 소년 레지오 창립 때는 단장 소임을 반 강제적으로 맡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소임은 그나마 봉사니까 괜찮았는데, 고통스러웠던 것은 술자리였습니다. 재수생인 저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지만, 일요일에는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청년미사가 끝나면 언제나 이어지는 술자리에 끌려가 술을 먹어야 했습니다. 가지 않으면 비아냥과 조롱이 돌아왔기 때문에 스무 살인 저는 위축이 되어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월요일에도 숙취 때문에 고생이 심했습니다.

이윽고 대학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계 대학에 입학하게 된 저는 여러 고민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활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학교 교목실이었습니다. 가서 수녀님, 신부님 면담 뒤에 복사단에 가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의 활동이 신앙생활의 분기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부활절이 돌아왔는데, 미사 및 행사를 학교에서 아니면 본당에서 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청년회 행사에 가면 술을 너무 많이 먹고 힘들 것 같아, 새로운 사람들과 학교 적응을 위해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교목실 미사는 만족스러웠고 학교에서 있었던 밤샘 행사를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행사를 끝나고 본당에 갔는데 저는 그곳에서 이미 끝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본당 미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년회장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주먹과 발길질에 쓰러졌는데도 폭행이 계속돼 옆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던지고 성당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렇게 떠난 본당을 다시 찾은 것은 2014년 봄이었습니다. 발을 뗀 지 7년 만이었습니다. 그 사이엔 학교 교목실에서 복사단 활동, 다른 교구 성당 청년선교단체와 성가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교적상 다른 교구 다른 본당 신자였지만 그 성당을 떠나 다른 곳을 떠돌아다니며 활동을 하는 이른바 ‘떠돌이 신자’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본당’은 떠나도 ‘성당’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요.

그 이후 본당에서 판공성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 교적상으론 냉담자로 분류돼 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본당을 떠나 이리저리 다니며 자유롭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계 학교여서 굳이 본당에 가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본당에 갈 필요를 못 느끼게 하는 이유입니다.

알아보니 저처럼 여러 사유로 본당에는 가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 활동하거나 자유롭게 성당을 돌아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이른바 ‘떠돌이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때 교리교사를 하던 분은 교적은 본당에 두고 활동은 다른 성당에서 하고 있었고, 어떤 분은 매이는 게 싫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통계상으로는 냉담자로 잡혀 있을 저와 같은 부류들은 냉담자 관리나 냉담자 연구에서도 소외되고 있는 실정인 것 같아 혹시라도 선생님 연구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긴 글을 보내 드리게 되었습니다.

   
▲ 가톨릭 신자는 1년에 2번 있는 판공성사표를 3년 이상 한 번도 내지 않으면 냉담자로 분류된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 사연을 읽으며 잠시 젊은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던 해 대선이 있었다. 대선 즈음 공정선거 감시단 활동에 참여했는데, 새로 옮긴 본당이어서 청년들 대부분이 낯설었다. 주임신부님은 나의 활동을 적극 지지했지만 사목위원과 청년 다수는 뒤에서 나에 대해 수군거렸다. ‘굴러 온 돌이 설친다’ 정도의 말일 줄 알았는데 주임신부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뒷소리를 하는 청년들에게 나는 ‘운동권’도 아니고 아예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청년 담당 수녀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다 뒤집든, 성당을 떠나든지 했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텨 그 본당에서 단체장을 거쳐 청년회장까지 하였다.

지나고 나면 그 세계 안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당할 때는 그리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말로 상처를 입었지만 이 사연의 주인공은 물리적 폭력까지 당했다. 상처가 더 깊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을 사람의 잘못으로 보았을 뿐, 교회 문제로 보지 않았다. 성숙한 분이다. 그러니 지금도 신앙생활을 계속하시는 것이리라.

이분도 말미에 예를 들었지만 이런 서류상 냉담 교우들이 제법 된다. 내가 잘 아는 50대 후반의 남성은 자기와 성향이 맞지 않는 사제가 오자 이웃 본당으로 나갔다. 사제가 이동하자 다시 돌아왔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왜 사제가 맘에 안 든다고 냉담을 해. 지가 맘 있으면 잠시 다른 본당에라도 가 있으면 되지. 성당 좋다는 게 뭐야. 어디 가나 같은 거 아냐? 소나기 올 때 잠시 피하는 거지. 뭐 하러 냉담을 해!”

오늘 소개한 사연의 주인공이나 나의 지인은 그 본당이 혹은 사제가 싫을 뿐 신앙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이들이다. 이런 이들이 서류상 냉담자의 한 유형을 이룬다. 천주교에서 우스개 소리로 하는 교구 신자와 전국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참고로 교구 신자는 본당에선 활동하지 않고 교구 일만 하는 신자다. 전국 신자는 전국적으로 활동하느라 본당 일에 무심한 이들이다. 이들은 미사도 하고 고해성사도 한다. 단지 본당에서 판공성사만 하지 않을 뿐이다. 가톨릭 NGO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일부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이들은 여러 경우에 미사에 참례하고 소속도 가톨릭임을 명확히 한다. 하지만 본당엔 나가지 않는다.

자기 본당이 옆 본당보다 멀어 이런 이중생활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내가 속한 아파트도 이런 경우였다. 몇 년 전 본당 구역이 조정되기 전 우리 본당은 집에서 1.2킬로미터 거리에 있었고, 옆 본당은 500미터 거리였다. 이 때문에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사는 신자 절반은 옆 본당으로 나갔다. 이 가운데 부지런하지 않은 분들이 본당에다 성사표를 내지 않아 서류상 냉담자가 되었다. 이밖에도 취업, 학업 때문에 집을 떠나 사는 이들의 일부가 서류상 냉담 신자가 된다.

그래도 여전히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있다. 이런 분들은 서류상 냉담 신자일지라도 현재 미사참석자 통계에는 잡힌다. 이들의 숫자를 포함한 미사참석률이 2015년 12월 31일 현재 20.7퍼센트였다. 이들의 규모가 일정 비율 존재하는 점을 고려하면 순수 냉담자 비율이 더 높아진다. 이 때문에 지난 원고에서 추정했던 완전히 떠난 신자 비율과 미사 참석 신자 비율을 제외한 그 중간의 신자층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은 과연 누구일지가 더 궁금해진다.

처음 연재를 시작했을 때 여러 지인들이 냉담 유형이 다 알 만큼 뻔해 쓸 게 별로 없을 것이라 단언하신 바 있다. 그런데 난 갈수록 미궁이다. 아직 소개할 사례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내가 쓰고자 하는 바가 냉담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된 이래 어떤 사람들과 만났는지에 대한 것이기에 마르지 않는 샘을 파는 셈이다. 기대하시라!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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