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40]

인터뷰 대상자를 찾는 일이 어렵다고 푸념했더니 하느님이 도우시는지 가까운 곳에서 오늘 소개하는 분이 나타났다. 가톨릭 행동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였다. 행사 뒤 남은 분들이 모두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이분은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옆 테이블에 있는 분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요즘 나의 관심이 이른바 ‘기승전 냉담’인지라 금세 화제가 냉담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이분이 뜻하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호탕한 분이라 이어지는 나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 주었고 이 글에 소개하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그녀는 40대 후반이다. 중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절친 인도로 동네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가족들 가운데는 지금까지 자신 외에 신자가 없다. 영세 뒤 고등학교 일학년 때까지 열심히 주일 학교에 다녔다. 학생회에서는 중요한 직책도 맡았다.

고2 때부터 대학 입시에 치중하게 되면서 성당을 쉬기 시작했다. 한참을 쉬다 혼인할 때쯤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를 설득해 영세시켰고, 나중에 그와 성당에서 혼배 성사를 하였다. 혼배 후 다시 쉬기 시작했다.

몇 년 뒤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아이의 유아 영세를 위해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 영세 뒤 다시 쉬기 시작하였다. 아이도 남편도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최근까지 그러고 있는데, 남편과 아이들은 자신과 달리 얼마 전부터 성당에 재미를 들려 열심히 나가고 있다.

자신은 가끔 광화문에서 열리는 야외 미사나 어쩌다 본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자신은 법적으론 냉담자지만 여전히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분위기, 엄숙함을 좋아한다. 가톨릭을 싫어하는 이유보다 좋아하는 이유가 훨씬 더 많은데 성당에는 나갈 마음이 없다. 가톨릭을 떠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분은 현 규정상 냉담자다. 그러나 가끔 미사에 참례하기에 전체 미사 참석률에는 영향을 주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분명히 냉담인데 마음으로는 여전히 신자이고, 가끔이긴 하지만 신앙 활동에 참여하는 유형이다. 냉담이 매우 복잡한 현상임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사례가 더 있으면 묶어 분석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심심풀이로 내가 천주교를 완전히 떠난 사람들의 규모를 추정해 본 것이 있어 소개해 보려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 문제는 속 시원히 규명할 기회가 없을 게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나와 있는 자료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추정해 보겠다. 참고로 이 추정치는 사회과학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수치이니 그야말로 재미로 봐 주시길 바란다.

알다시피 2015년 1월 한국갤럽에서는 "한국의 종교"라는 조사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1984년부터 2014년까지 5차례 실시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이라는 제목의 조사결과 비교를 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두 문항의 결과를 이용해 천주교회를 완전히 떠난 냉담자의 규모를 추정해 보았다.

첫째, ‘무종교인의 과거 신앙 경험 종교’다.(표1 참조) 이 결과에서 무종교인은 전체 응답자의 50퍼센트(746명)였고, 무종교인 가운데 종교 경험비율은 34.4퍼센트였다. 그리고 이 경험자들 가운데 10퍼센트는 천주교 출신이었다.("한국의 종교", 한국 갤럽, 2015, 220쪽) 

〈표 1〉 ‘무종교인의 과거 신앙경험 종교’

    불교 개신교 천주교 기타
  사례수(명) % % % %
과거 신앙 경험 비종교인 전체 257 22 68 10 0

이 비율을 전체 남한인구로 확대 적용해 본다. 남한 인구 5000만 가운데 무종교인이 2500만 명이고 이 가운데 과거 종교를 가졌던 이들의 숫자가 약 860만이다. 따라서 이 과거 종교 경험자들 가운데 10퍼센트인 86만 명이 천주교 출신이라 억지로 추정할 수 있다.

이를 2014년 12월 31일 기준 ‘2014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적용해 보면 이 해의 전체 신자 수가 556만 971명이었으므로 86만 명은 이 전체 신자 수의 15.5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비율이 천주교를 떠나 무종교인 상태에 있는 셈이다.

둘째, 종교인 가운데 10퍼센트가 과거 다른 종교를 가진 경험이 있었다.(표2 참조) 종교 인구를 2500만 명으로 보면 이 가운데 10퍼센트인 250만 명이 지금 가진 종교 이전에 다른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있는 셈이다.("한국의 종교", 한국 갤럽, 2015, 197쪽) 이 가운데 천주교를 거쳐 간 이들은 이 250만 명의 17퍼센트인 42만5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표 2〉 ‘종교인의 과거 타 종교 경험’

    불교 개신교 천주교 기타
  사례수(754명) 334 318 98 4
종교인 전체 비율 10% 9% 17% 24%

이를 2014년 12월 31일 기준 ‘2014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적용해 보면 전체 신자 수가 556만 971명이었으므로, 이 가운데 7.6퍼센트(42만5000명)가 천주교를 떠나 이웃 종교에 가 있는 셈이다.

이 두 결과를 기초로 천주교 신자였다가 무종교인이 된 신자 비율 15.5퍼센트, 이웃 종교로 개종한 신자 비율 7.6퍼센트를 합하면 전체 신자 수의 23.1퍼센트가 ‘천주교를 완전히 떠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앞에서도 당부드렸지만 이는 믿을 만한 수치가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추정해 본 것일 뿐이다. 그래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대략 20퍼센트 정도는 천주교를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시면 될 터이다.

그러면 미사에 참례하거나 판공성사에 참여하는 비율 35퍼센트 미만, 완전히 떠난 비율 20퍼센트 내외를 제외한 45퍼센트의 정체만 밝히면 될 것이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도 이 범위에 들 것이다.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의견들을 기꺼이 환영한다.

▲ 묵주기도 하는 가톨릭 신자. (이미지 출처 = vimeo.com)

마지막으로 지난 칼럼(2016년 9월 26일자)을 보고 독자 분이 의견을 보내 오신 것이 있어 소개한다.

어느 신자 분의 편지로 시작된 흥미로운 내용의 칼럼을 읽고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냉담은 사제 책임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저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20대 중반까지 개신교 신자였고 그 후 종교를 갖지 않고 살다가 십 년이 지나 천주교로 개종한 신자입니다.

특별한 어떤 은총으로 직접 하느님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성사, 전례, 성상 등의 표징을 통해 체험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나 수도자 또한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게 해 주는 하나의 눈에 보이는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알고부터 온전히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한 점 의심도 없이 영원한 생명을 믿게 되는 그런 은총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런지요? 저같이 평범한 많은 신앙인들이 죽어서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을 뵙고 비로소 온전히 믿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말을 그래서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제나 수도자는 세상과 하느님나라, 그 경계에 있는 하나의 표징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일생을 통해 보여주는 표징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는 표징.

성경이 하느님이 직접 성경 저자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쓴 온전한 하느님 말씀이 아니듯, 교회에서 행하는 전례나 사제, 수도자 또한 완벽한 하느님의 투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갈망이 일정 부분 개입되어 있는 하느님의 표징이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성서를 열심히 읽고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면 살아생전에 완벽하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일까요? 학식이 높고 강론의 은사를 입은 사제의 강론을 많이 듣고, 성경 말씀을 한 자 한 자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고도 외울 정도면 가능한 것인지요?

저의 얄팍한 앎으로는 사제의 훌륭한(?) 강론을 듣는 것도 성경 공부도 죽을 때까지 내가 하느님께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응답이자 일생을 통해 내가 해 나가야 할 숙제이지 그것이 나에게 정답을 알려 주는 답안지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를 보내신 분이 제기하신 뜬구름 잡는 듯한 사제의 강론이나 성경 읽기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둣한 교회의 분위기에 대한 말씀은 어느 부분 저도 많이 동의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적으로 그것만이 신앙생활을 좌지우지하는 듯한 뉘앙스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떠나 지금은 뭐라 말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개신교에서 목사님의 말씀은 일종의 신자들의 개별적인 이해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정답을 제시하는 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확하고 속 시원하며 그래서 신자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집어 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종파나 거주 지역의 교회가 사실상 무의미해서 일단 목사님의 말씀이 나의 욕망과 갈증과 맞느냐 아니냐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저도 개신교 교회를 다녔을 때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전 예배에 참여해서 목사님 말씀이 나와 맞는지를 중요하게 체크했었고 또 교회 분위기도 나와 맞는지 여러 번 사전 답사 비슷한 것을 했었습니다.

미사 중에 사제의 강론이 지루하고 아무 감흥이 없다고 느끼는 것의 어느 정도는 결국 목사님의 말씀이든 사제의 강론이든 자기 자신의 갈증을 누가 얼마나 잘 해소해 주느냐는 것의 기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물론 사제의 강론의 부실함에 대해서는 저 또한 할 말이 적지 않습니다. 2년 남짓 매일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승->전->착하게 사세요.’라는 강론을 들을 때는 사회생활은 다 접고 평신도들도 전부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복음의 내용과 상관없는 듯한 소위 빵빵 터지는 이야기만을 늘어놓을 때는 레크레이션 강사이신가 싶기도 하고.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의 본인 일기장에서 골라 와 소통없이 그저 읽는 듯한 강론에는 역시 사제는 사제고 평신도는 평신도인가 하는 괴리감도 느낍니다.

하지만 제가 사제에게 느끼는 실망감 혹은 존경심의 많은 부분은 미사 중 5분, 10분 남짓하는 강론에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행동이나 모두가 피하는 몇몇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 사목활동에서 드러나는 사제가 우선시하는 가치관 같은 것들입니다.

이야기가 두서없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길게 썼지만 결국 사제는 사제로서 부족하지만 최선을 대해 강론을 준비해야 하고 신자는 사제도 나와 같이 하느님의 은총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해의 여지를 두는 것이 신자들이 강론을 들을 때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합니다.

나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신앙심의 책임이 사제의 강론도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시키지 않는 시스템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들을 때마다 눈물을 훔치게 하는 강론을 들을 수 있고 성경 말씀을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체계가 나의 취향과 잘 맞아 떨어진다면 뭐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런 이유로 내가 교회를 떠날 수 있으니 주의해 줘라는 말은.... 왠지 자기 합리화 같습니다.

2016년 9월 27일
어느 독자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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