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8]

이번에는 지난달 독자께서 내게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메일 내용은 뜻을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 내용을 삭제 또는 수정하였음을 밝혀 둔다. 우선 메일 내용을 옮겨 본다.

선생님께서 ‘냉담 신자’에 대해 꾸준히 써 주시고 있는 글들을 매번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사드려요. 저의 이야기이기도 한 듯해서 특히 뜻이 깊습니다. 혹시 연구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어 제 이야기도 조금 들려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주 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저는 반 년 넘게 제대로 된 미사 참례와 영성체를 못했고 스스로 ‘냉담 신자’ 또는 ‘쉬는 신자’라 생각하고 있어요. 한때 제가 속한 본당 공동체에서 전례 봉사자로서 열심히 활동하며 성체성사를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긴 적도 있지요. 스스로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지난 시간 동안 저지른 과오에 대한 반성과 기도, 고해성사를 실천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다 분가하여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하게 되고, 대학원까지 입학하면서 생활이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빠지기 시작하자 그동안 꾸준히 하던 신앙 실천과 노력에도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결혼해 함께 사는 아내가 신자가 아니고, 종교에도 관심이 많지 않은 인문주의자여서 저 혼자 성당에 나가기가 머쓱합니다. 이 영향도 크지요.

어떻든 저는 아무래도 성공회로 옮기게 될 것 같아요. 실제로 집 근처에 있는 성공회 교회 주일 미사에 참여해 보려 했는데 상당히 먼 게 함정이더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관면혼이니 영성체 전 고해성사니 이런 복잡하고 에너지와 시간 많이 드는 일들을 강요하지 않고, 어느 교파에서든 세례받은 신자에게 성찬례는 언제나 열려 있다고 표현하며, 더구나 여성 사제 서품도 이뤄지는 성공회가 많이 편안하게 느껴지더군요.

어쨌거나 지금은 대학원 공부와 결혼 생활에 집중하느라 천주교든 성공회든 교회에 거의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신자로서 주일에 무슨 복음이 봉독되는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주일 전후로 잠시 기도하고 그 주일 독서와 복음을 읽는 최소한의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다시 천주교를 바라보니 참 복잡한 마음이 드네요. ‘정말 답답하고, 꽉 막히고, 전근대적이고, 재미없고, 사람들을 우매한 신앙에 묶어 두려는 듯한 교회’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프란치스코 교황님 생각하면 좋기도 하고, 정든 동료 신자들, 신부님들을 생각하면 천주교를 떠나게 될지 모른다는 게 아쉽고 미안합니다. 제가 과거에 전례 봉사를 열심히 했던 일을 회상하며 대체 무엇에 홀려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그 시간에 대해 나름 의미 부여를 해 보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했던 헌신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약해 적는다고 시작했는데, 제법 길어졌네요. 앞에서 적은 내용이 요즘 제 신앙생활의 현실이에요. 기회가 닿으면 또 편지를 쓰거나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답을 쓰려는데 나의 생각을 확장하는 글을 만나게 되어 이것도 간단히 소개하고 내 의견을 써 보려 한다. 이 글은 정희완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지난주 금요일인 9월 9일 한국 평협 주최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이다. 해당되는 부분만 짧게 인용해 보겠다.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가톨릭 신자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우리의 무엇을 보고 우리를 가톨릭 신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가 성당을 다니고 있어서? 우리가 믿는 가톨릭 교리 때문에?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오직 성당 다니는 것으로만 표현되는가?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종교적 이념으로 여기는 교리에 대한 충성으로만 표현되는가? 성당 다니는 일과 교리로만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면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신앙은 단순히 종교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성적 동의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어떤 종교적 관습에 익숙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앙(faith)은 신념(belief)과 태도(attitude)와 행동(action)과 소속되기(belonging)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은 가톨릭 교회에 소속되어 가톨릭적 종교생활을 하는 것과 가톨릭 교리를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가톨릭적 태도를 취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형성된다.... 가톨릭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가톨릭적 태도는 어떤 것일까?
가톨릭적 태도의 핵심은 사목적 겸손과 관대함과 포용성이다. 겸손과 관대함과 포용성은 자비의 다른 이름이다. 자기 자신만이 진리를 갖고 있다는 교만과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옹졸함과 진리의 이름으로 타자를 심판하고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은 가톨릭적 태도가 아니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은 어떤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열린 모습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과정과 수련의 정체성이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그저 가톨릭적 관습과 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무엇보다 삶 안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삶의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신앙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신앙의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살게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끊임없이 깨어 성찰할 때, 신자들은 교회 쇄신의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진한 글씨는 필자 강조)

우선 내 글을 관심 있게 읽어 주심에 감사드린다. 편지 내용을 소개하는 것도 선선히 허락해 주셔서 더욱 감사드린다. 사실 나는 이분이 갖고 있는 고민에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저 나의 고민을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독자분들 가운데 이 고민에 대하여 좋은 답을 갖고 있는 분들은 이 지면을 통해 나눠 주시길 바란다.

▲ 명동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있는 신자들 모습. ⓒ정현진 기자

1. 요즘 한국교회에서 신자의 범위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성사 참여, 교리에 대한 승인 내지 확증을 위한 노력, 금전적 기여, 평신도 사도직 활동 참여, 영성 생활을 위한 개인적 노력만으로 신자 여부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사실 종교사회학적 의미의 종교성을 구성하는 주요 지표들만으로 신자임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교회에 남아 있는 신자들도 어떤 지표는 실천하고, 어떤 지표는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종교성의 지표를 ‘한다’, ‘하지 않는다’로 나눠 경우의 수를 계산하거나, 각 지표마다 다섯 개 척도로 나눠 다시 다섯 가지 지표와 교차시키면 역시 무수한 경우의 수가 나온다. 신자들이 교회에 남아 있는 이유도 사람 수만큼 다르다 할 정도로 다양하다. 신자 범위를 확정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신자의 범위를 규정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중세와 같이 교회가 신자들에 대한 규정력을 많이 행사하는 시대일수록 신자 범위를 규정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요즘과 같이 종교가 시장 상황에 있고, 교회가 신자들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시대에는 최소한의 형식적 요건만 충족시키면 신자로 간주된다. 이를테면 신앙의 동기와 상관없이 미사에만 충실히 참례하면 일단 신자다. 미사에 가끔 참례해도 교무금을 책정해 내고 있거나, 판공성사만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면 신자다. 종교성의 모든 지표들을 충족하는 사례는 당연히 신자다.

문제는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데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미 몸과 마음이 다 떠난 이들을 제외하고(교적의 30퍼센트 정도 추정), 형식적으로든 마음을 다해서든 현재 미사에 참례하는 20퍼센트 정도의 신자들을 제외한 50퍼센트 정도가 이 범위에 들 터이다. 개신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와 비슷한 상황이라 한다. 불교는 본래 신도들이 소속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방식이니 이러한 신자들의 범위가 훨씬 넓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나 이웃 종교들이나 상황이 비슷하면 신자들에게 규정력을 행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하진 않을 터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 독자께서도 부담을 느끼지 말고 좀 기다려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일단 선택했으면 최선을 다해 투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성에 차지 않겠지만 말이다.

2. 다른 교파나 종교의 사정은 소속된 사람들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에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음이 떠나면 자신이 있던 곳이 상대적으로 다른 곳들에 비해 더 좋은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나의 경험에 비춰 보면 교리와 실제 모습이 일치하는 교파, 종교는 전혀 없었다. 표방하는 바와 실제 삶이 일치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내가 속한 교회가 지상의 하느님나라이기를 바라지만, 이는 도달해야 할 목표일 뿐 현재 실현되는 상태는 아니다. 게다가 요즘 어느 종교도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대응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니 취향의 문제라면 모를까 다른 교파로 옮긴다 해서 가톨릭에서 충족되지 않는 바가 실현될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왜 나는 종교인으로 남아 있으려 하는지, 종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가톨릭이 최고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도 교회 안에 있는 불만족스러운 요소들 탓에 힘들 때가 많다. 그런데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특히 난 전례, 그레고리오 성가를 좋아 한다. 가톨릭의 영성 전통과 수도생활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소다. 더러 존재하는 불만족스러운 요소들은 쇄신 운동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다른 교파들의 사정을 잘 아는 터라 옮긴다 해서 더 뾰족한 수를 보게 될 것이라 믿지 않는다. 게다가 수십 년을 이 집에 살다 보니 부모가 시원치 않아도 부모임을 부정할 수 없듯이 ‘싫어도 내 집’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내 집이 문제면 안에서 고쳐야지 이 나이, 이 경력대가 돼서 남이 쌓아 놓은 성과를 내 것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행히 남의 집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다니 굳이 옮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3. 신앙생활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뒤로 물러남 없이 계단을 오르듯 꾸준히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본 경우들은 대부분 초기의 뜨거운 열정이 점차 식어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거나, 식었다 뜨거워졌다를 반복하다 끝내 식어 버리거나, 미지근하게 끝까지 가거나 하는 경우였다. 드물게 초기에 뜨거워졌다가 식은 다음 천천히 다지면서 계단을 올라가듯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올라가는 경우도 보게 된다. 나는 이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경우라 생각하고 이 방향을 따르고 있다. 이 과정에 교회가 영향을 주긴 하지만 과거에 비해 부정적인 일에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공동체와 함께 가려 노력하지만 대체로 충분하지 않아 개인적 노력으로 버텨 내는 중이다.

정 회의가 들면 일단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 보는 방법도 권하고 싶다. 본래 이 신앙이 필요한 것이었으면 다시 돌아올 테고 아니면 말게 될 터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보면 하던 일을 다 하면서 언제 끝날지 모를 어두운 터널을 그저 지나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한다. 끝이 없는 터널은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 나는 더 이상 교회의 어떤 일들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믿음 안의 교회는 완전하나 현실의 교회는 그저 인간들의 군집일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인류의 종말이 올 때까지 지금 고민하는 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 완전치 않다. 이 객관적 사실 앞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 여하에 따라 독자분의 고민도 해결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또 틈이 날 때 답을 드리려 한다.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아 충분히 답을 드리지 못하는 점 송구하게 생각한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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