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무단 횡단 했으니까

자동차 산업의 차세대 먹거리로 각광받고 있는 자율 주행 기술의 개발 과정에 스탠포드를 비롯한 유수 대학의 윤리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첨단 테크놀로지와 윤리학이라면 얼핏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자율 주행 중에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윤리적 딜레마들을 놓고 토론을 하다 보면 참가자들이 품고 있는 윤리학적 전제들과 입장들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강의 중에 종종 이 문제들을 소개한다.

예를 들어 자율 주행 자동차를 타고 가는 길에 열 명의 무단 횡단자가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치자. 급정거를 해도 이들을 피할 수가 없어서 오른쪽으로 운전대를 꺾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쪽이 낭떠러지다. 직진을 하면 열 명의 무단 횡단자가 차에 치이게 되고, 피하려고 오른쪽으로 운전대를 돌리면 내가 죽을 판이다. 과연 이 상황에서 내가 타고 있는 자율 주행 자동차는 어느 쪽으로 향하도록 프로그램 되어야 할까?

여태까지 겪어 본 학생들 중에 절반쯤은 열 명의 보행자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더라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응답한다. 보행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솔직히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솔직한 응답이나,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으니 차라리 내가 죽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대답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최근 어떤 그룹 강의에서 들은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직진해야 한다. 보행자들은 무단 횡단을 했으니까!”

놀란 얼굴로 무단 횡단이라는 사소한 법규 위반이 어떻게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과 연결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니 그제야 다시 생각해 보는 눈치다. 윤리의 근간이 되어야 할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채 법이나 제도라는 형식에 맞추어 현실을 재단하는 풋내 나는 생각이고, 심리학자 콜버그의 도덕 발달 단계에 견주어 보면 6단계 중 4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미성숙한 상태다.

▲ 횡단보도.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2. 피해자의 책임

1955년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가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한 죄로 법정에 섰을 때,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이 발언은 희대의 망언으로 기록되고 박인수는 2, 3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지만, 피해자의 빼앗긴 권리에 분노하기는커녕 도리어 피해자에게 동정받을 자격을 요구하는 적반하장의 사이비 법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백주 대낮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구조하지 않는 국가의 무능력을 탓하는 대신, ‘수상 교통사고일 뿐’, ‘나라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놀러 가다 죽은 아이들’의 죽음을 왜 기억해야 하느냐고 저들은 되묻는다. 당사자들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덥석 물어버린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두고도 ‘자기 발로 돈 벌러 간’ 사람들 문제로 왜 발목을 잡느냐는 볼멘소리가 들렸다.

317일의 연명 치료를 끝내고 돌아가신 고 백남기 엠마누엘 형제를 두고도 혹자는 말한다. 그러기에 왜 불법 폭력 시위를 했느냐고.

실상은 칠순에 이른 노인이 시위 막바지에 무차별적으로 물대포를 쏴 대는 경찰 앞에 나서서 이제 다 끝났으니 물대포 좀 그만 쏘라고 외친 것이 전부다. 그게 죽을죄인가? 농정이 실패를 거듭해서 쌀 한가마니 팔아도 운동화 한 켤레를 못 사는 현실에, 앉아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시위라도 해본 것이 그게 죽을죄인가? 설사 그날의 시위가 불법이고 폭력적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죽을죄인가?

3. 생명보다 앞서는 것은 무엇인가

가톨릭교회는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낙태를 반대하고 사형 제도의 철폐를 주장해 왔다.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만이 주인, 곧 주님이시기에 설사 극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혹은 부모가 원하지 않은 생명이라 해도 그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다. 생명의 소중함을 새겨듣고 수호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요 상식이어야 한다. 하물며 무자비한 공권력의 남용을 만류하던 한 노인의 생명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리오.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피해자의 자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억울한 희생자가 되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거나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잃어도 좋을 생명은 없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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