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무식한 주교와 똑똑한 신학박사

파리 대학 총장을 역임한 신학자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18)에서 신학 박사들의 권위가 무식한 수도원장이나 개별 주교의 권위보다 앞선다고 발언하여 호응을 얻었다. 대부분의 주교님들이 탁월한 신학자이거나 교회 법률가이던 시절에는 그분들의 학문적 권위와 가르치는 직무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어날 여지가 적었지만, 스콜라 신학의 중흥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신학 박사들의 해박한 지식이 주교님들의 학문적 역량을 넘어서게 되자 학자들 사이에서 교도권에 대한 의심스런 눈초리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성직자들이 신학을 독점하던 것은 이미 어제의 일이다. 걸출한 평신도 신학자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고, 탁월한 식견과 예리한 논지를 갖춘 평신도들의 주장이 주목받는다. 신학을 전공한 성직자들이 후학 양성과 사목적 요구를 처리하느라 1년에 논문 한 편 쓰는 것도 힘들어 하는 사이, 왕성한 학문적 활동과 필력을 과시하는 평신도 신학자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본당 신부의 투박한 강론보다 성서학자들의 세련되고 정교한 해석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린다는 분들도 많다. 일반인이 배울 기회가 적은 신학의 영역에서도 평신도들이 약진하고 있는데, 하물며 세속의 일에 대해서는 어떠하랴.

2. 교도권에 대한 양면적 태도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교도권이 뒤늦은 입장 표명으로 뒷북을 울리는 동안, 해당 분야에서는 이미 치열한 논쟁이 저만치 줄달음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교들이 범접하기 힘든 곳에 멀찍이 계신다면, 평신도 활동가들은 헌신적으로 현장에 뛰어들고 함께 불의에 맞서며 사회적 갈등의 한가운데 선다. 그러니 교도권에 대해서 양면적 시선이 있는 것도 그럴 만하다. 한편으로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버티고 있는 세상에서 왜 교도권에 순명해야 하느냐는 탈권위주의적 주장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뭇사람을 능가하는 탁월한 주교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감동하게 해 달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어느 쪽이건 간에 깔고 있는 전제는 분명하다. 주교님들은 남달라야 하고 범상치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 주교나 교구장의 임명에는 무성한 하마평이 따른다.

▲ 목자와 양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3. 깨 백 번 구르는 것보다 호박 한 번 구르는 게 낫다?

올해 들어 주교님들의 임명 소식이 이어졌다. 지난 3월 조규만 주교님이 원주교구장으로 임명되셨고, 4월에는 배기현 주교님이 마산교구장으로, 이어서 5월에는 장신호 주교님이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셨다. 각 교구가 맞은 기쁜 소식을 들으면서 한낱 교구 신부에 불과한 필자에게도 많은 이들이 물어 왔다. 한마디로 그분들이 탁월한 분이시냐는 질문인데, 생각해 보면 그 탁월함의 기준이 대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분이냐 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하기야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주교님이 자신의 뜻에 동조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깨 백 번 구르는 것보다 호박 한 번 구르는 게 낫다고, 내가 바라는 교회상을 구현해 줄 탁월한 주교님이 나오신다면 교회의 쇄신이나 사회적 역할도 훨씬 앞당겨지지 않겠느냐는 바람인 셈이다.

4. 교도권의 본질

그러나 교도권의 본질이 과연 탁월한 능력의 지도자를 뽑고 그분의 이끄심에 기대는 데 있는지는 다시 물어볼 일이다. 교도권(Magisterium)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고백하는 믿음에 대하여 권위 있게 가르치는 공적인 직무를 일컫는 말이다. 동시에 교도권은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주교님들이 공식적으로 신앙과 윤리에 대해 가르치는 일들을 통해서 교도권이 수행된다. 그런데 애초부터 교회는 이 교도권을 똑똑한 신학박사에게만 맡겨 두지 않았다.(사실 올해 임명된 주교님들은 똑똑한 신학자들이시다) 그것은 교도권이 신앙인들에게 우월적인 능력에 대한 외적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권위에 대한 자유롭고 내적인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탁월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강제가 아니라 내 기대에 설사 못 미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형제적 자세로 마음을 합하는 데 교도권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 때로 내 지향과 어긋나거나 부족해 보이는 가르침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그것 또한 교도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의 하나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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