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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터널, 파묻힌 한 마리 양- 조현철

도로의 터널이 무너진다. 마침 그 터널 속을 지나던 사람이 파묻힌다. 영화 ‘터널’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련 검색어 1위로 ‘세월호’가 떠올랐을 정도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많이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다.

터널이 무너져 길이 막혀 버렸다. 인근에서 공사 중이던 제2터널의 발파작업도 구조에 영향을 준다고 중지됐다. 구조가 지연되면서, 난감한 선택에 직면한다. 구조를 계속할 건가, 제2터널의 공사를 재개할 건가? 생존이 확인된 초기에는, 구조 쪽이 우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공사 지연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차량 통행 지연에 따른 불편 등, 각종 우려와 불만이 터져 나온다. 생존 여부가 불확실해지자, 이젠 죽었을 거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들 싶어 한다. 결국 공사를 재개한다. 발파가 시작되고, 무너진 터널은 더 무너진다.

엄청난 양의 흙과 바위 더미 속에 양 한 마리가 파묻혀 있던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까진 몰라도, 나머지 99마리 양을 버려둔 채 이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갈 순 없다는 얘기다.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질 순 없다는 얘기다.(루카 15,3-9) 그러기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안타깝지만, 결국 사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얘기다. 현실의 선택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영화의 이 상황은 우리에게 또 다른,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생명일까? 돈과 이윤일까? 대부분, 전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론 다르다. 이미 오래전에 우리 사회는 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조사를 위해 특조위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을 때, 대통령은 이런 요지로 거부했다. “돈이 많이 들어서.” 입으론 생명과 사람을 말하지만, 실제론 돈이 판단과 실행 기준이다.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다.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꽤 많다. 하지만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 현실을 방관, 추종한다.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기제가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여기서 딴 생각하면 낙오된다는 두려움. 앞이 아닌 옆을 보면 끝장날 수 있다는 두려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공포에서 나오는 엄청난 그러나 서글픈 힘이다. OECD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 최저의 출산율이 암시하듯, 이 힘은 생명을 갉아먹으며 생겨난다.

현실의 선택은 결국 한 마리 양을 포기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묻고 확인해야 한다. 한 마리 양을 포기할 때, 고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한다면, 얼마나 고민하는가? 그저 숫자로 계산을 하고, 속으론 일찌감치 결론을 내리는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정말 최선을 다한 뒤에야 결정을 내리는가? 수치에 근거해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것과 매번 고민과 최선의 노력 끝에 결정을 내리는 것. 겉으론 같은 결정일지 몰라도,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간다.

   
▲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노란 종이배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람’으로 먼저 생각하나, ‘하나’라는 숫자로 먼저 생각하나?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304명의 생명을 한순간에 앗아 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그렇게 쉽게 “돈이 들어서”라며 거부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정당한 요구를 정부가 “돈이 들어서”라고 외면하며 기업의 논리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주거환경과 교육환경을 망가뜨리는 화상 경마도박장을 공기업인 마사회가 “돈이 되니까”라며 주민들 몰래 건물을 짓고 문화센터로 위장하면서 영업을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정부가 “돈이 되니까”라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도박 중독자로 망가뜨리는 화상 경마도박장을 감싸고 돌 수 있을까? 일본군 위안부, 핵발전소, 가습기살균제, 물음과 의문은 계속된다.

우리는 사람을 숫자로 계산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엄연하고 슬픈 현실이다. 일단 사람을 숫자로 환산하게 되면, 많고 적음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의 304명이나 이 땅의 평범한 99퍼센트나 별 차이가 없게 된다. 어느새 나도, “나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만다.

돈이 기준과 원리가 될 때, 생겨나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형태’와 ‘규모’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다. 형태와 규모의 적절함은 생존과 직결된다. 예를 들어, ‘거인증’과 ‘소인증’ 모두 심각한 문제다. 헌데, 돈은 적절한 형태와 규모를 모른다. 오직 자기 증식을 위해, 앞으로 돌진한다. 옆을 돌아볼 줄 모른다. 효율이 최고의 미덕이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결국 파국을 맞는다. 거인이 자기를 지탱하기 힘들어 무너지듯. 제국이 스스로 몰락하듯. 사랑이 기준과 원리가 되면, 달라진다. 창조주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비움'(kenosis)이다. 육화가 그렇고 십자가의 죽음이 그렇다.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이웃에게 내어 준 지상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은 절제한다. 옆을 돌아본다. 타자를 위해 자신이 멈추고, 자신의 공간을 내어 준다. 타자도 살고, 자신도 적절한 규모와 형태를 유지한다.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는다는 복음의 비유를 이상적인 그래서 비현실적 교훈 정도로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우리 자신은 어떤지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는지. 내 삶을 움직이는 원리는 어떤 것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을 섬기는지, 우리의 탐욕이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를 섬기는지. 나를 움직이는 원리에 따라 나는 행동한다. 내가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내 삶의 형태와 규모가 좌우된다. 그렇게 모인 형태와 규모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우리가 터널에 파묻힌 한 사람을 ‘하나’라는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여길 때, 햇수가 아무리 쌓여도, 바다에서 아직 수습하지 못한 아홉 사람을 ‘아홉’이란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여길 때, 그럴 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느님나라!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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