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민중은 개,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 주면 된다.” 지금도 믿기 힘들지만,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의 말이다. 정부는 술 마시다가 나온 취중실언이나 개인적 일탈 정도로 무마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겐 취중진담으로만 들린다. 문득 이런 물음이 생긴다. “과연 이게 이 사람만의 속내일까?” 국민을 개, 돼지로 생각한다는 고위 관료를 보고 있으니, 지금껏 이해되지 않던 정부 인사들의 행태에 관한 의문들이 속속 풀린다.

작년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 직사로 백남기 농민이 사경에 빠졌지만, 지금껏 아무런 처벌도 사과도 없었다. 현장 지휘자는 승진했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나향욱처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지난 7월 4일, 그날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는 모두 인정했고, 한 위원장의 주장은 모두 기각했다. 집회의 성격, 경찰의 불법적 행동, 차벽 설치가 집회의 자유 침해라는 헌재의 판결도 무시했다. 이런 부당한 판결이 나온 배경을 이젠 알 것 같다.

세월호 사건 초기, 대통령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느라 그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젠 좀 알 듯하다. 그때,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아와 컵라면을 먹었던 교육부 장관, 라면에 계란을 넣은 것도 아니라며 장관을 옹호했던 청와대 대변인, 사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던 안행부 국장의 행태에 대한 의문도 이젠 좀 풀린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보고도, 전기가 남아돌아도,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 허가를 강행했다. 핵발전소 반경 30킬로미터 내에 근 400만 명이 살고 있는 부산, 울산, 경남은 세계 최대의 핵발전소 밀집지역이 되었다. 이권이 아무리 커도,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할 수 있을까? 이젠 그 의문이 많이 풀린다. 지상 18층, 지하 7층, 우리나라 최대의 화상경마장이란 도박장을 용산에 몰래 짓고 문화시설이라 강변하며 영업을 강행하고도, 틈만 나면 화상경마장을 더 지으려는 ‘마사회’라는 공기업과 이를 감싸는 정부에 대한 의문도 많이 풀렸다.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정치 권력자와 고위 관료들의 속내가 정녕 이렇다면, 이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 대는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말처럼 고약한 것도 없게 된다. 지도자들의 번제물에 물렸고, 분향 연기도 역겹다고 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심정을 이제야 알겠다.(이사 1,10-17) 이사야가 이런 지도자들에게 촉구한다. “공정”을 추구하라.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는 것”이 공정이다.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것이 정의다.

오늘 이 나라의 권력자들도 정의를 말한다. 이들의 정의는 힘이고, 이들의 힘은 약한 이들을 가차 없이 깔아뭉개는 무력이다. 이 무력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합법화 된다. 이 공권력으로 공정과 정의와 평화가 보장될 거라 한다. 하지만 그건 가짜 평화일 뿐이다. 진짜 평화는 그런 폭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참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며,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질서의 열매다.(이사 32,16-17; "사목헌장" 78항; "찬미받으소서" 92항) 창조질서의 보전이 정의이고, 평화는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던 평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하셨던 당신의 평화다. 샬롬!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훼손된 하느님의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 갇힌 이들은 모두 창조질서의 훼손을 뜻했다. 이들과 함께 했던 것은 창조질서 회복의 행위였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나라의 구현이기도 했다. 그러니 예수가 원하셨던 평화를 이루려면, 사람을 개, 돼지로 생각하는 권력, 힘없는 이들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불의한 질서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정의고 평화다. 예수께서 세상에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 연유다.(마태 10,34) 예수의 칼은 세상의 권력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폭력의 칼’이 아니다. 이 칼은 불의한 질서, 사람을 죽이는 질서, 자연을 수탈하는 질서를 도려내는 칼,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정의의 칼’이다.

▲ "이 칼은 불의한 질서, 사람을 죽이는 질서, 자연을 수탈하는 질서를 도려내는 칼,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정의의 칼’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훼손된 창조질서의 회복을 놓고 사람들이 갈라진다. 거기에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고, 그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 “집안 식구”도 갈라서기 일쑤다.(마태 10,36) 그래서 정의와 평화의 길을 가며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얻게 된다. 이들이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하느님의 뜻을 중심으로 새 가족이 형성된다. 고난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함께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 그래서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길은 ‘홀로’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이다.

현실은 여전히 엄혹하다. 엄청난 권력은 서로를 싸고돌며 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곤경에 처하면, 노골적으로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피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도 있다. 우리는 권력자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이들'인가.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주는 “시원한 물 한 잔”이 절실하다.(마태 10,42) 하찮아 보여도, 이 물 한 잔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정의와 평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연대의 손길이 된다. 서로 힘든 만큼, 서로 토닥여 주며, 창조질서가 엉망으로 훼손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 나가자. 그렇게, 예수께서 갈망하셨던 하느님나라가 더욱 자라나도록 하자. 그렇게,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다 하셨던 창조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도록 하자.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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