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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연민: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조현철

언제부턴가, 이 땅에 영문도 모르게 자식을 잃고 애간장을 태우며 길거리를 헤매는 엄마들이 넘쳐 나고 있다.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로 304명이 죽었고, 이 중 250명이 단원고 학생들이다. 2006년부터 사람이 죽기 시작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 상당수가 영,유아다. 5월 28일 오후 5시 57분, 지하철 구의역 사고.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던 하청노동자가 전동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어 처참하게 죽었다. 19살이다.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마을에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만난 적이 있다.(루카 7,11-17) 과부는 당시에 고아와 떠돌이와 함께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은 거의 절대적 존재, 자기의 보호자였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의 삶이 순탄할 리 없다. 엎친 데 덮쳐, 나인의 과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렸다. 이 과부는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이 과부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신을 차디찬 바다에서 건져 내어 아이들 장례를 치러야 했던 엄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직 아이들 시신도 찾지 못한 엄마들은? 이유도 모른 채 폐가 굳어져 사망한 아이들의 엄마, 평생 산소 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엄마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가방에 컵라면과 나무젓가락만 남긴 채 떠나 버린,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노동자의 엄마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을 외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과부에게 예수는 말을 건넨다. “울지 마세요.” 필시 일면식도 없었을 여인에게 말을 건넨 것은 그 처지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가엾은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은 연민을 일으킨다. 연민(compassion)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다. 연민은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누려는 의지를 포함한다. 연민은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연민은 행동한다. 우리를 움직이도록 하는 것만이 진정한 연민이다. 예수는 죽은 젊은이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여기서 과연 무엇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수는 과부의 슬픔에 깊이 공감했고, 연민이 올라 왔고, 행동했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실 이 같은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다. 무관심 또는 무시.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갈 길을 가는 것.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프란치스코 교종은 세상에 만연한 무관심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무관심은 공감의 상실이고, 연민의 실종을 뜻한다. 오직 자기를 향한 관심만이 남는다. 세월호 유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농성 중이던 국회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애원하고 울부짖는 유족들에게 눈 한번 주지 않고 왔다, 갔다. 유족들은 철저히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또 다른 판박이 사건. 작년 11월, 집회 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지금까지 혼수상태인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 200일이 지났지만, 사과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없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보여 준 공감의 부재, 무관심의 극치였다.

따지고 보면, 어디 대통령만의 문제랴.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무관심의 만연과 함께 공감 능력은 급속도로 상실되었다. 힘 있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가 심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돈! 사회적 고통과 불행 뒤에는 불의한 제도나 관행이 있고, 그 뒤에는 여지없이 돈이 똬리를 틀고 있다. 돈과 이윤이 이웃으로 향해야 할 우리의 마음을 잡아 삼킨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으로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보게 된다. 그건 바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역 앞에서 KTX 해고 승무원들이 자신들의 해고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 후 해고 승무원과 만나 취재를 하던 한 젊은 기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자에게 사연을 물었다. “오는 도중 보도자료를 읽고 이들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막상 사람을 직접 만나 얘기를 하니 또 눈물이 났다.” 그 기자가 쓴 기사는 공감과 연민의 표현이고, 행동이다. 구의역을 찾아가 자신의 공감과 연민을 ‘포스트 잇’ 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전히 의구심이 우리 주위를 맴돈다. “우리가 이런다고 과연 세상이 바뀔까?”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지하철 안전문 참사에서 보듯, 외양만 다르지 뿌리는 같은 사건들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종은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말씀을 건넨다. "이러한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회에 선을 퍼뜨려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실을 가져 옵니다.... 더구나 그러한 행동의 실천으로 우리는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찬미받으소서", 212항) 설혹 느낄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세상에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변혁의 씨앗이고, 하느님나라의 씨앗이다. 또한, 그런 노력으로 더디게 변하는 세상에서 나는 적어도 내 삶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아도, 예수는 우리의 희망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공감과 연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감과 연민이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우리의 마음이 실제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정책에 반영되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을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도록 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231항) 이것이,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좇는 세상, 사람이 죽어 가도 내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악다구니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법이다. 아니, 이것만이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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