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칼럼]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낭독한 광복절 경축사가 또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민을 갈라놓고 있다. 그가 경축사 서두에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한 것이 말싸움의 불씨였다. 지금 국가와 국민의 안위가 걸린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나라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의 축제인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억지를 부려 정부와 국민 사이에, 국민들끼리 논쟁을 벌이도록 싸움을 붙인 박근혜 대통령의 양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15일은 일제에 강제로 주권을 빼앗겼던 우리가 상하이 임시정부와 미국 등지에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활동한 애국지사들의 노력 그리고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일본, 이탈리아 등을 패배시킨 연합국의 승리로 잃었던 독립을 되찾은 문자 그대로 광복의 날 광복절이다. 8.15를 표현하는 데 우리에게는 광복절 이상의 적합한 말이 없다. 우리가 근 70년 불러온 국경일의 이름이다.

그런데 조국의 국권 회복과 민주 발전을 위해 눈에 띄는 기여를 한 게 전혀 없는 친일 세력들이 마치 자기들이 대한민국을 세운 주인공인 양 이 날을 건국의 날 건국절이라고 부르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다. 부끄럽지도 않는가?

지금 박근혜 정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의 무리들이라는 국민의 비판과 조소가 쏟아지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가? 아니면 독재와 부정선거로 학생들에 의해 축출돼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이승만을 무덤에서 끌어내 민주공화국의 국부로 부활시키는 음모를 벌이겠다는 건가?

지금 세계에서 스스로 건국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는 나라 수가 과연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그 이름이 공식으로 사용된 지 1000년이 되지만 프랑스인들이 건국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프랑스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혁명일(프랑스혁명일)을 최고의 국경일로 기념한다. 그러나 혁명 이후 태어난 나라들이 건국한 날을 국경일로 정하느니 마느니 논쟁을 벌였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건국일을 공식으로 지정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꼭 좋은 일만 선물하는 것은 아니다. 건국절은 오히려 많은 문제를 배태할 수 있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들과 접촉하고 교류하며 살아간다. 국가가 망해 없어지거나 새로 건국하는 국가가 생기면 간단치 않은 국가 간 책임 문제가 발생한다. “건국절”을 공식화하면 책임 문제도 공식으로 제기될 것이다. 축하보다는 발생할 문제를 처리하는 일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내다봐야 했을 것이다. 신생국을 제외하고는 건국절을 지정한 나라가 거의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시작부터 건국 68주년을 강조했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지금 일본이 후안무치하게도 우리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은 독도에 대한 역대 왕조의 지배 기록을 제시하며 영유권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건국한 날로 했다며 이 날을 건국절로 지정하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법적 지배권의 효력은 어떻게 될까? 건국절 주장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대책도 준비해 뒀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은 치밀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도 준비해 뒀다. 임시정부의 헌법(1919.9.11) 1,2,3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대한민국 인민에게 있고 그 영토는 구(舊)한국의 판도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광복의 날을 내다보고 준비해 둔 감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201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호칭했다가 여론의 강한 비판에 부딪치자 다음 해에는 건국절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고집이 꺾인 건 아니었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연거푸 건국이란 말을 광복절에 대한 축하의 말 다음에 슬며시 끼어 넣었다. 건국절에 대한 반발을 누그려트려 보려는 소매치기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민 여론은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건국절로는 통일문제도 설명하기 어렵다. 한반도는 8.15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돼 두 국가가 "건국"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 한국의 판도로 한다는 임시정부의 헌법 제3조와 대한민국 헌법 전문 및 헌법 4조의 통일조항으로 통일의 길은 닫히지 않았다.

지금 북한은 정치적 이념적으로 대한민국과 한 나라가 될 수 없는 이질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평화통일의 길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임시정부는 1943년 11월 27일 미, 영, 중 세 정상이-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와 독립을 되찾는 것을 약속하는-카이로선언을 채택하는 데도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연합국은 한국의 광복을 이 선언으로 약속했다. 연합국도 한국의 “광복”을 도왔다. 그런데 광복에 티끌만큼도 보태지 않은 자들이 “건국”의 아버지 행세를 하겠단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돼 독립을 되찾는 데는 임시정부의 활약이 아주 중요했다고 본다. 8.15 광복절은 임시정부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해서 얻은 민족적 성과였다. 박근혜가 “건국절”을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고 광복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다. 독립선열에 대한 모독이다.

박근혜나 새누리당 친일 세력들이 건국절의 상징으로 앉히려는 이승만 자신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자였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방 후 그는 권력욕에 눈이 가려 독재자로 변신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부정선거로 정권을 유지하고 결국 3.15부정선거를 저질러 이에 분노한 학생들의 4.19혁명으로 국민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아무리 애국자라도 국민에 의해 축출된 인물을 대한민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추켜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의 심판은 냉엄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 친일 세력은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승만의 참담한 최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소수가 아니라 고통받는 다수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좀 더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건국절의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 편집자 - 필자 약력에서 <미디어 오늘> 공동대표로 나갔던 것은 착오이므로 바로잡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장행훈(바오로)
언론인.
파리 제1대학 정치학 박사,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초대 신문발전위원장, 현 언론광장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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