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칼럼]

박근혜 대통령은 13일 청와대로 국회 3당 원내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금년 제36회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때는 지금까지 금지해 오던 추모곡 '님을 위한 행진곡'을 모두 제창할 수 있게 보훈처장에게 이야기 하겠다고 약속했다. 3당 대표들은 오랜만에 정부와 국회 사이에 대화와 소통의 길을 툭 터주는 결단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언론도 19대 국회 4년 동안 꽉 막혔던 청와대와 국회 관계가 마침내 해빙기를 맞게 될 것 같다며 크게 보도했다.

그랬는데 5.18을 이틀 앞둔 16일 박승춘 보훈처장이 이런 분위기에 얼음물을 쏟았다. 보훈처장이 제창에 반대한다고 회답했기 때문이다. 차관급인 보훈처장이 대통령의 의사를 묵살한 것이다. 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하니 이제 대통령의 영도 서지 않는 것 같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런 해석과는 달리 보훈처장이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했다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속”을 꿰뚫어 보는 그가 대통령이 맞을 매를 대신 맞아 준 행동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님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허용해 주도록 보훈처장에게 이야기하겠다는 말은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박승춘 처장은 극우 성향이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예찬자다. 대선을 앞두고 국가보훈처가 방문객들에게 우편향된 안보 교육을 실시한 것이 드러나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 행동은 대선에 개입할 목적이었다는 의혹도 받았다. 교육용이며 상영된 DVD에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고 진보 세력을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5·16군사정변을 미화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도 연임된 아주 드문 경우다. 대통령이 3당 원내대표에게 약속한 것을 묵살했는데도 청와대에서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을 보면 박 대통령이 그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야당은 박 대통령이 안 변했다고 보고 있으며 원내 대표들이 청와대 회동에 응하지 않는 게 나을 뻔 했다고 후회한다는 뒷말이 들리고 있다. 한마디로 박근혜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속지 않으려면 해임 결의를 추진한다는 말로 그칠 것이 아니라 결의안을 통과시켜 해임하게 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승춘 처장은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정한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점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다수 국민의 여론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국가기념일로까지 지정됐으니 공개적으로 반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동아일보 사설 페이지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기념식에서 불러지는 것을 결사반대한다”는 대한민국상이군경회장 이름의 5단 광고가 실렸다. 요즘 신문에 많이 보도된 어버이연합 류의 광고로 보인다. 정부의 그림자가 보이는 광고 같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민주국가의 대통령인데도 신군부 특전사 군인들에 의해 수백 명의 시민이 무참히 살해되고 수천 명이 부상한 민주화투쟁의 기념행사에 취임 첫해 딱 한 번 참석하고 그 뒤 3년째 불참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5.18 민주화 투쟁에 대한 그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 '님을 위한 행진곡' (이미지 출처 = youtube.com)

대통령을 대신해 대독한 황교안 총리의 기념사를 보자. 부패 방지와 국가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자는 말은 나오는데 시민을 학살한 “신군부”나 “대량 발포”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없었다는 비판이 많았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 대표를 포함해서 모든 참석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님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이 제창하는데도 총리는 시종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런 정부를 민주정부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사설을 쓴 신문도 있었다.

광주 학살의 발포 명령자인 전두환은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광주 학살과는 무관하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한겨레가 취재한 보안사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은 발포 전날 발포 명령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은 4.19와 비교되는, 어쩌면 4.19보다 더 혁명적인 시민들의 민주화 혁명이었다. 그래서 전두환이나 노태우 등 신군부 패거리는 5.18 민주화운동을 미화하는 것을 생리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호도할 수 있겠는가?

신군부 세력이나 그 정권의 수혜자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추모곡인 동시에 민주화운동 전체의 상징이 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의 영향을 받은 불온한 가요로 낙인 찍고 배척한다. 박근혜 정권도 그 점에서는 다른 보수 정권과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 노래를 거부하는 이유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이 만든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이라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5.18 기념행사에 노래를 제창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 때 정부가 1997년 광주 민주화 투쟁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공식 지정한 뒤에 '님을 위한 행진곡'은 행사의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었고 그 후, 1년 간 행사때 모두 노래를 제창했다. 이 노래를 행사 프로그램에서 배제하고 식전 프로그램에서 합창으로만 부르게 변경한 것은 2009년 이명박 정권 2년째부터였다. 그렇게 바꾼 이유가 궁색하다. 이 노래가 북한과 연관된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갖다 붙였다.

하지만 '님을 위한 행진곡'을 거부하는 이유로 거론되는 북한의 '님을 위한 교향시'는 5.18이 일어난 지 9년 뒤에 북한이 남쪽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모델로 한 것이지 '님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의 '님을 위한 교향시'를 표절한 것이 아니다. 북한 관련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폄훼하기 위해 지어낸 핑계일 뿐이다.

한마디로 5.18은 민중의 위대한 민주화투쟁이다. '라마르세예즈'은 프랑스 혁명 때 공병 장교 루제 드릴이 라인 주둔 프랑스 군대를 위해 작곡한 군가로, 혁명때 국가로 불리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폐지되고 제3공화국 때부터 국가로 불리고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도 국가로 불릴 수 있는 노래라는 생각이다. 가사가 프랑스 국가보다 훨씬 온순하다.

그런데도 가사 내용과 음악의 리듬이 어울리면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신비의 힘을 발휘한다. 5.18과 음악이 하나가 될 때 생기는 신비력이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 투쟁에 참여할 때 더욱 신비력을 발휘하는 노래 같다. 박근혜 정권이 '님을 위한 행진곡'과 화해할 때 한국의 민주가 발전하고 정부와 국민이 소통하고 하나가 될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장행훈(바오로)
파리 제1대학 정치학 박사,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초대 신문발전위원장, 현 언론광장 공동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