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사월의책, 2016

이제 17개월 된 딸을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을 한 지 두 달 되었다. 일 년 계획하고 시작했는데 처음엔 단순히 회사를 안 간다는 게 더 설레었을 뿐이고, 육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마음 자세부터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 엄마가 지시사항을 정리해 준 쪽지대로 수행하면서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엄마를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나 자신이 딸보다 더욱 열렬하게 엄마의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꼴이 참 우스웠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렇다.

청소, 빨래 등은 원래 해 오던 것이니 문제가 아닌데 아이 본다는 것이 지극히 집중적 노동이기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말 그대로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서 문을 열어 놓고 변기에 앉아 있던 적도 있다. 나중에 들으니 거기에 앉은 채 요기를 했다는 어느 어머니의 처절한(?) 이야기도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걸음마가 익숙하지 못해 자꾸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조금 걸음이 잘 걸어지니 이제는 서툴게 종종 뛰다가 엎어졌다. 인간이란 종의 어린 개체는 어떤 공간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는 본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만 떼면 사고가 날 만한 곳에 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늘 아이가 다칠까 봐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뗄 수 없으니 다른 일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기저귀 갈고 옷 갈아입히는 것조차 매번 아이가 떼를 쓰면서 저항하니 쉽지 않았다. 급기야 “아이고야, 너 좋으라고 해 주는 건데 넌 대체 왜 그러냐!”고 아기에게 하소연까지 해봤다. 아기는 내 말에 흠칫 눈을 홉뜨더니 다시 울었다.

▲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노승영), 사월의책, 2016.
나도 휴직 전에 나름대로 아이를 돌보았다고 자부했는데, 아이와 단둘이 남으니 그런 말이 말짱 헛것이었다. 짜증 내는 아이 앞에서 그동안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아이와 둘이 지내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아이도 걸음이 안정되어서 잠시 눈을 떼더라도 뭘 하는지 귀만 열어 놓으면 괜찮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파트 단지에서 육아를 하는 다른 ‘엄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 등원, 하원시키고 아이가 보채면 하루에 서너 번씩 산책하기 위해 다니는 아파트 단지 내 뒷길이 있다. 이곳은 나무가 우거져서 이번 여름 내내 짙은 그늘을 드리워 준 고마운 길이다. 이 ‘그림자들의 길’로 나처럼 아이를 돌보는 엄마, 혹은 할머니가 유모차를 끌고 나온다. 그리고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놀이터가 있다. 그곳에는 조금 큰 아이들 엄마가 벤치에 앉아 있거나 아이를 미끄럼틀에 올려 주고 있다. 모두들 매일 같은 시간에 다니는 형편이니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만난다. 늘 특정한 지점에서 엄마들은 유모차를 밀거나 아기띠를 하고 있거나 킥보드를 챙기고 있다. 하루하루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고 그 풍경 속에서 아이들만 반짝이며 조금씩 자랄 뿐 어른들은 모두 배경이거나 그림자들처럼 보인다.

간혹 회사 일을 이렇게 안 하고 일 년이나 보내도 괜찮을지 걱정이 된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 가끔 연락이 오면 더 마음이 쓰인다. 다시 회사로 돌아갔을 때 적응이 안 되면 어쩌나 심란할 때도 있다. 이런 마음들을 그 똑같은 풍경 속에 서 있는 엄마들도 함께 느꼈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육아하는 사람의 하루 일과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얼마나 치열한 감정 노동이고 육체노동이며 고숙련 노동인지, 그 작업 과정이 시간대별로 얼마나 긴박하게 조직되어 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중요한 사물을 취급하는 작업은 특별하게 대우받는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도 다루기 어려운 인간, 그것도 어린 인간을 다루는 일이 이토록 단순하고 낭만적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그림자 노동"은 대표적으로 가사 노동을 포함한 임금 노동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노동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산업 사회에서 누군가 ‘돈 버는 일’(임금 노동)을 하려면 또 누군가는 그 임금 노동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돈을 받지 않는 노동(그림자 노동)을 해야만 한다. 밥 먹고 출근하려면, 누군가는(혹은 스스로가) 밥을 지어야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산업 사회에서 이러한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의 결합은 남녀의 결혼으로 이루어져 왔다. 물론 한 사람이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을 함께 하기도 한다. 그림자 노동의 예는 “대부분의 가사 노동, 장보기, 학생들의 벼락치기 시험공부, 직장 통근 등이 있다.” 말하자면 그림자 노동은 가사 노동 외에도 임금 노동이 가능해지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대가를 주지 않는 노동이다. 저자는 이 둘을 이렇게 비교한다. “임금 노동을 하려면 그 일에 지원을 하거나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나면서부터 정해지거나 부여되는 것이다. 임금 노동을 하려면 발탁되어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배정받는 것이다.”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이제까지 그림자 노동에 덜 배정되어 왔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그림자를 착취하는 위치에서 살아왔다. 나의 그림자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문득 그림자의 손을 잡고 일으켜 겅중겅중 뛰게 만들면 그림자가 비로소 나의 사랑하지만 예속된 노동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의 얼굴로 변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육아라는 노동을 ‘엄마’에게 의존하거나 은연 중에 전가시키지 않고 온전히 내 임무로서 해내야만 한다.

 
 
강변구
출판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딸이 태어난 새내기 아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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