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왜 분노해야 하는가", 장하성, 헤이북스, 2015

내가 다니는 회사는 지금 노조와 임금 협상 중이다. 원래 그해 실적에 따라 적당히 몇 퍼센트씩 인상하곤 했는데, 몇 년 전부터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전 직원 정액 인상을 요구안으로 내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임금이 많은 사람은 임금이 적은 사람에 비해 손해 본다고 느낄 수 있다. 300만 원이 오르면 연봉 3000만  원은 10퍼센트 인상이지만, 6000만 원일 경우는 5퍼센트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이런 인상 방식을 유지하는 데 찬성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노동자의 임금연대에 대한 가치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적이 아주 나빠서 적자가 났을 경우 회사는 임금동결안을 내놓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경영 실적에 대해 노동자들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문제보다 노동자들 내부에서 논란이 생긴다. 임금동결안에 고임금 노동자들은 ‘고통 분담 차원에서 올해는 수용할 수 있지 않나’라고 주장하고, 생활임금 상승이 간절한 저임금 노동자들은 불만이 커진다. 이런 상황이 몇 년 지속되면 임금연대의 가치에 회의가 생길 수 있다. ‘노조에 가입했더니 오히려 내 임금만 안 오르고 있다. 개별 협상을 한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받을 수도 있을 텐데.’ 경우에 따라서 지극히 합리적 판단일 수 있다. 게다가 개인별 노동의 양과 질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차등화는 임금체계의 공정성에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임금 차등화 전략은 장기적으로 노동자들의 내부 이해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임금이나 근로조건에 대한 교섭력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임금연대라는 가치로 개별 노동자들의 이해를 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할 뿐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연대가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바닥에는 구조적인 ‘임금 불평등’이 있지 않을까. 개인 간 임금 차등에 합리적 근거가 있고, 또 누구나 그 근거(연공, 실적 등)를 충족할 때 그에 맞는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으면 괜찮다. 그런데 합리적 근거가 있더라도 그 ‘차등’이 격렬(?)하면 ‘격차’가 된다. 그리고 그 격차가 구조적으로 지속될 때 ‘불평등’이 생긴다. 사람들은 차이보다 불공정, 그리고 불공정이 지속되는 불평등한 구조를 참기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그 구조에 의해 자신의 몫을 지속적으로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임금연대는 지속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불평등한 사람들끼리는 도저히 연대할 수 없는 법이니까.

▲ "왜 분노해야 하는가", 장하성, 헤이북스, 2015. (표지 제공 = 헤이북스)
"왜 분노해야 하는가"(장하성)는 한국의 불평등을 집요하게 설명한다. 이만하면 대강 무슨 말인지 알겠다 싶은데도 저자는 무수한 통계를 끝까지 제시한다. 마치 대학 강의에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자상한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관해 강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야간 편의점 알바를 막 끝내고 돌아온 학생이 자리에 앉아 졸음을 참으며 노트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 그럼 지금부터 요약해 보자. (요약이 무척 엉성할 테니 가능하다면 책을 사서 보자.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 먼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그놈의 금수저니, 흙수저니 숟가락 재질이 아니라, 다달이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더 큰 이유다. 재산소득이 아닌 일해서 버는 노동소득의 격차 때문에 불평등이 생긴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불평등한 상황으로 인하여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경제적 고통을 겪는 것은 재산 불평등보다는 ‘버는 것’의 격차, 즉 소득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소득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용 불평등이다.”(25쪽) 고용 불평등이란 노동계 통계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현실을 말한다.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정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다. 거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이라는 기업 간 불균형이 불평등의 원인이다.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60퍼센트 수준이다. .... 재벌 100대 기업은 한국 모든 기업의 순이익 60퍼센트를 차지한 반면에 중소기업은 35퍼센트에 불과하다. [대기업이] 이익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고용을 담당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정상적인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간신히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한국 사회의 임금 불평등은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일까? 세계에서 임금이 가장 불평등한 나라는 미국이다. 임금 하위 10퍼센트에 비해 상위 10퍼센트가 5.1배 많이 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결국 한국 역시 세계에서 임금이 가장 불평등한 나라인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한국 사회가 이렇게 불평등했을까? 우리나라는 기적적인 경제 성장 덕분에 임금을 고르게 많이 올려 줄 수 있었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도 소득 격차가 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97년 외환위기 뒤부터다. 경제성장률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도 전체적인 임금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정규직을 만들어냈다. 대기업은 시장의 이익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불평등은 정부가 복지정책으로 보완하고 있다. 물론 그 재원은 세금이다.

이제까지 누군가 회사에서 임금 격차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면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누가 뒤꼭지에 대고 ‘야, 부러우면 지는 거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왠지 거부하기 힘든 이런 말들에 저자는 속 시원하게 반박 논리를 제공한다. “불평등 상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열망과 노력은 부러움, 시기심, 질투에 근거해서 더 많은 부를 갖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과 분노를 갖도록 만든 조건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식적인 시도’인 것이다.” 그래, 부러운 게 아니라 분노한 거였다. 절이 싫은 게 아니라 절을 지배하는 고위층 중들이 싫었던 거다. 항상 그 중들은 자신을 절과 동일시하며 자기들이 싫으면 떠나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해왔다. 문제는 절의 운영 방식을 바꾸는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 노조의 임금연대는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평등은 부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탈출해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너무나 불공정한 게임 속에서 경쟁해 왔던 거다. 이 시합에서 이기면 안 된다. 오히려 시합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게임의 룰을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

 
 
강변구
출판 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딸이 태어난 새내기 아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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