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류은숙, 서선영, 이종희, 코난북스, 2016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던 분이 ‘짤렸다’고 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맨 먼저 해고 사유를 묻고 해고통지서를 서면으로 받았는지 등을 묻는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거의 대부분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왔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아니 본인이 사표를 냈는데 어떻게 해고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들이 회사를 그만둔 과정을 들어보면 형식적으로는 자진 사직이지만 실제로는 내쫓긴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개의 과정은 이렇다. 사장의 말을 듣지 않거나, 어떤 권리를 강하게 요구하거나, 실적이 좋지 않거나 등의 이유가 있으면 그때부터 유달리 강한 ‘쪼임’이 시작된다. 업무 진행 일정이나 방식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꼬투리를 잡으며 닥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뜻 보면 업무 지시 사항이기 때문에 딱히 뭐라 반박하기 힘들다. 반박하기는커녕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받는 처우라고 생각해 주눅 들기 쉽다. 또는 다른 동료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을 깎아내리는 소문을 내기도 한다. 은근슬쩍 밥을 같이 안 먹거나 회사 일정을 안 알려 주는 따돌림이 일어나기도 한다.

꽤 지난 일이지만 외부에 이미지가 좋은 어떤 출판사는 직원을 이 부서 저 부서로 함부로 발령을 내는 방식으로 쫓아내는 걸로 유명했다. 아무튼 이런 기간이 어느 정도 지속되면 누구나 자신과 회사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부분 스스로 짐을 싼다. 버티고 있어 봤자 내가 클 수 있는 조직이 아니라는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 버티고 있으면 회사가 권고사직을 내민다. 이유는 간단하다. 업무 미숙 또는 회사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다. 권고사직이 곧 해고는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이 다니던 직장에서 사직을 ‘권고’ 받은 사람에게 무의미하다. 마치 일방적으로 예의 없는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처럼 나의 잘잘못과는 관계없이 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다. 왜냐하면 나의 자존감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류은숙, 서선영, 이종희, 코난북스, 2016. (표지 제공 = 코난북스)
이처럼 회사에서 정식으로 해고장을 받고 그만두는 경우보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쫓겨나는 경우가 더 많다. 경영자들도 해고라는 법적 요건을 회피하기 위해 이런 꼼수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터에서 쫓겨나고, 재취업이 어려워지면 결국 사회에서도 배제되어 간다. 이는 한 사람에게서 세상을 빼앗아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게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괴롭힘과 그로 인한 모욕감은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데, 마치 덥고 습한 공기로 가득찬 목욕탕처럼 일터에는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 나쁜 공기가 가득하다. 회사를 어느 정도 다녀 본 사람이라면 매일 출근하는 것이 두렵고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슴이 먹먹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 것이다.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은 일터괴롭힘의 정의, 유형, 영향, 괴롭힘이 일어나는 배경, 일터에서 맺는 관계의 의미 등 일터괴롭힘이라는 주제에 관한 포괄적인 개요를 정리해 준다. 그러면서 인권운동 현장에서 겪은 여러 사례들도 풍부하게 보여 준다. 일터괴롭힘이란 한마디로 노동에서 존엄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일터괴롭힘이 저성과자로 낙인을 찍고 빈 방에서 하루 종일 벽을 보고 서 있게 하는 사례처럼 사람들의 공분을 살 때도 있지만 어떤 괴롭힘은 뭐, 그런 걸 가지고 예민하게 구냐는 식으로 무시당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상사가 회의 자리에서 누구 한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욕감을 주는 방식으로 업무 관련 발언을 할 때 우리는 이것을 그냥 직장이라면 어디나 한 사람쯤 있는 흔한 폭군으로 치부할 것인지, 아니면 일터괴롭힘으로 볼 것인지 혼란스럽다. 분명한 것은 내용에 대한 지적이 아닌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침해하는 방식을 사용할 때 아무리 업무라는 목적이 있어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 정신적 폭력에 있어 ‘동기’가 있을 수 있어도 ‘원인’은 없다.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저 사람은 나한테 맞을 짓을 했다, 욕을 먹을 만하다’라고 할 때 나의 폭력이 발생한 동기가 그에 대한 나의 분노라는 사실이 어느새 그의 행동과 나의 폭력이 합리적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포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터괴롭힘은 이런 방식으로 자주 은폐되어 나 개인의 무능력, 상사의 괴팍한 성격 등으로 정리되어 버리곤 한다.

일터괴롭힘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노동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고, 돈을 주고 사온 용역으로만 치부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으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원칙이 천명되었다. 우리는 노동을 팔아 임금을 받지만 그것은 인간과 분리된 채 팔려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은 분리할 수 없다. 만약 노동이 순수한 상품이라면 일터 역시 순수한 시장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와 경영주는 상품과 그것을 산 구매자의 관계로 맺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는 어떤 인간적 요소도 없다. 그러나 회사는 시장이 아니라 인간으로 구성된 하나의 사회다.

"별주부전"에서 거북이는 간을 두고 왔다는 토끼에게 속았다. 어릴 때는 거짓말한 토끼가 얄미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간을 떼어 놓을 수 있을 거라는 거북이의 생각 자체가 이미 토끼를 자신과 동등한 동물로 인정하지 않고, 용왕의 진상품으로 대상화했다는 의미가 읽힌다. 일터괴롭힘의 가해자들도 거북이와 다를 바 없다. 노동자들이 자존감을 떼어 놓고 다닐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바로 문제의 시작이다.

 
 
강변구
출판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딸이 태어난 새내기 아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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