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아직 상영되지 않은, 어쩌면 당분간 상영할 수 없을지 모를 영화의 시사회장을 얼마 전에 다녀온 적 있다. 대형 영화사와 배급망에 구애되지 않은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분단 상태에서 빚어질 수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애환을 극으로 풀어낸 내용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완성도를 높이는 편집을 진행하면서 그 영화에 작은 지원을 한 사람에게 시사회 기회가 주어졌다.

시사회를 마치고 들어선 식당에서 우연히 주연배우와 마주 앉게 되었다. 얼굴과 이름이 대중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젊은 배우였는데, 어떤 이가 물었다. 전업 배우인가를. 어느 정도의 수당을 받았는지를. 독립영화 배우의 수입으로 생활이 가능할지 궁금했는데, 전업 배우는 아니었다. 받은 돈 역시 얼마 되지 않았다. 용돈보다 조금 많을 정도에 그쳤지만 불만은 없다 했다. 다만 단역이든 주인공이든, 배우로 참여할 기회가 부족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일본 시민단체의 사정을 잘 아는 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나라에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일본도 극히 예외적일 텐데, 반나절 열심히 일하고 이른 오후 퇴근해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젊은 우편배달부가 사법고시에 도전해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우리도 어쩌면 가능할 텐데, 놀란 우체국 고위 관리의 특별 승진 제안에 손을 저은 이유가 독특했다. 소득은 이미 충분하고, 남는 시간에 시민단체 활동할 수 있는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 사회도 가능할까?

우리보다 인구와 예산 규모가 훨씬 큰 중국에서 나오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가 얼마나 될까?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 모르지만, 중국에서 만든 영화나 드라마를 의미 있게 본 경험이 없다. 영화배우나 감동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방면 전문가는 권위주의 사회에서 다채로운 상상력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문제의식이 당돌하거나 주제넘게 다른 의견을 표출하면 정 맞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 (이미지 출처 = youtube.com)
페이스북에서 본 우스개를 하나 소개한다. 모 국제학교에서 교사가 쪽지시험을 냈다.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다른 나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쓰시오!” 그 문제를 놓고 아프리카 학생이 답을 적지 못했다. 교사가 그 이유를 물으니, “식량이 뭔지 몰라서”라고 대답했다. 눈만 멀뚱거리는 유럽 학생에게 물으니 “부족이 뭔지 몰라서”라고 말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미국 학생은 “다른 나라가 뭔지 몰라서”였고 머리를 긁적이는 중국 학생은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나. 쪽지를 채우지 않는 한국 학생에게 “자넨 뭘 모르나?” 교사가 물으니 “이 문제 입학시험에 나옵니까?” 되물었다고 한다.

권위주의가 남은 중국에서 발칙한 창작은 아직 어려운 모양이다. 배가 몹시 고프거나 입시나 출세에 매달려야 하는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의 요구에 자유로운 창작은 후순위로 밀릴 것이다. 중국은 영화감독과 배우의 양성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지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은 생각보다 드물다. 우리는 중국보다 나을까? 알바에 시간을 빼앗기는 우리 문학, 음악, 미술 전공의 대학생들은 다채로운 작품을 지속적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 초중고 과정은 물론이고 대학과 대학원 과정에 등록금을 내지 않는 유럽보다 결코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않을 텐데.

서울시립대학 학생은 알바에 시간을 빼앗길 이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등록금이 사립대학의 4분의 1에 불과하니 비로소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한다는 거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현장을 방문한 자료를 만들어 친구나 선후배와 토론을 하고 교수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등록금이 아예 없는 유럽의 학생들은 우리처럼 무의미한 알바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취직에 대한 불안은 어려서부터 입시에 매달리게 한다. 대학에 입학해도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해야 하니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경험과 지식은 무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키우기 어렵다. 그저 돈과 출세를 위해 길들여지는 방향으로 자신을 고문하며 행복을 저당한다. 길들여져야 낙오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일에 창의력을 발휘하며 자부심으로 일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기준이 정해지고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다채로운 일은 존중되지 않는다.

▲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대학생들. (이미지 출처 = www.youtube.com)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없지만,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돈 잘 벌던 의사나 회사 중역이 하던 일을 ‘때려치고’ 돈 안 되는 창작에 몰두하는 사례가 언론에 이따금 소개된다. 교수나 교사로 은퇴하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함박 웃는다. 그런 사례가 언론에 흥미롭게 소개되고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건, 부러워하는 이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 아닐까? 탈출하고픈 현재 상황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젊어서부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한 우리는 훗날의 막연한 행복을 위해 현실을 구속하거나 저당한다. 열심히 돈 벌어 나중에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리라 다짐하지만 불안을 부추기는 현실은 언제나 녹록하지 않다. 남보다 더 잘 되어라 키워야 하는 자식, 자신을 키우다 지쳐버린 늙은 부모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블랙홀처럼 투자해 키운 자식은 행복의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한다. 현재를 구속하거나 저당해왔기 때문이리라.

교육은 ‘줄 세우기’가 아니다. 행복은 우두머리가 가부장적으로 정한 기준과 대체로 무관하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제하는 교육은 교육답지 못하다. 전공분야가 구체화되는 대학과 대학원도 상상력은 자유로워야 혁신적인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상위 1퍼센트에 들어가는 학습이 교육일 수 없다. 아니 상위란 있을 수 없다. 서로 돕지 않는 일이 어디 있다던가?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이는 다른 이의 일을 얕잡아 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교육은 학생의 행복에 대한 투자일 때 빛난다. 자신이 행복하게 투신할 일을 학생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교육이 나서야 한다. 진정한 투자가 그러하다. 알바에 시간을 빼앗기게 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 (이미지 출처 = www.youtube.com)

젊은이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찾아 몰두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기본소득을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젊은이에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사라진 등록금도 기본소득이다. 학생에게 월급을 주자고 제안하는 이도 있다. 물론 많은 돈은 아니다.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은 일은 학생마다 다양하다. 학생에게 돈과 시간을 투자하자. 상상이 자유롭도록. 창작은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때 다채롭다. 우리 삶은 덕분에 풍요로워진다. 나를 배려하는 이웃이 있을 때 진정 풍요롭고, 사회는 안정적이 된다.

어떤 목적으로 권력자가 정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오늘도 불안해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어쩌면 기본소득이 아닐까? 내일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투자가 아닌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금고에 비자금 넣어 놓고 불안에 떠는 재벌도 줄 세우기를 탈피하는 재단을 만들어 젊은이에게 기본소득을 투명하게 제공할 수 있다. 재기발랄한 창의력이 빛나는 젊은이가 어떤 기업을 창안했는지 재벌은 알리라. 숱한 경험이 증명하므로.

기본소득은 꿈이 아니다. 젊어서부터 빚으로 파이팅하는 사회는 낙오자를 속출하게 한다. 길들여진 자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젊은이에 대한 투자에 돈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사회를 언제까지 꿈만 꾸어야 하나. 젊은이의 행복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부터이거늘.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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