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한상봉]

“평화는 아무 것도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상실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나치에 학살당한 유대인이 600만 명이고, 그중에서 200만 명이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비오 12세 교종의 이 말이 이율배반적임을 단박에 깨닫는다. 비오 교종은 유대인 학살을 멈추기 위해 어떤 발언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자비한’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나치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전쟁 기간 동안 ‘복음’을 집무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운동의 창립자였던 도러시 데이는 반전 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중이라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5월 27일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 아베 신조 총리와 함께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숨진 모든 희생자를 위해 묵념할 계획이라고 한다. 전쟁이 낳은 인류의 상처 가운데 전쟁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 가운데 하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실험’이다.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핵무기 실험’이 가능하고 ‘애국심’이라는 명분으로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불의한 전쟁’을 일찍 끝내기 위한 마땅한 조치였다고 말하지만, 당시 유럽의 전쟁은 끝났고, 일본의 패배가 결정적인 전쟁 막바지에 원폭 투하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만든 핵무기의 위력을 가늠해 보려는 ‘무자비한’ 선택이었다. 당시 원폭으로 사망한 총 인원은 25만 명이었으며, 이 바람에 함께 피폭되어 죽은 한국인도 4만 명이나 되었다.

고적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였던 토머스 머튼이 <가톨릭일꾼> 신문에 실은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글에서는,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굳이 피폭 지역으로 히로시마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통상 공습은 군사 기지나 군부대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히로시마는 군사 시설이 없는 민간인 거주 지역이었다. 머튼은 “한 번도 공습을 받지 않은 도시에 원자 폭탄을 투하해야 원폭의 효과를 정확히 검증할 수 있다”는 판단에 그곳이 선택되었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 지역 주민들은 ‘적국의 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실상 미국에 의해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전쟁 종식이라는 명분을 내밀기 위해 전쟁이 아예 끝나 버리기 전에 서둘러 원폭 투하가 행해졌다. 게다가 나가사키는 천주교인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었는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성당의 경우에 1만 2000명이던 신자 가운데 8500명이 원폭으로 사망했다. 우라카미 성당의 머리가 부서져 나간 ‘원폭 성모상’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었는지 가늠하게 한다.

<프레시안>에 게재된 황희경 영산대 교수가 번역한 중국 지식인 간양(甘陽)의 글에 따르면, 미국이 이런 ‘무자비한 살상 행위’를 감행한 것은 적국 시민을 ‘짐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루먼은 히로시마 폭격이 대량의 부녀자와 아동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트루먼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폭격 뒤에 자신을 변호할 때 일본인은 짐승이며 당신이 짐승과 상대할 때 그것을 짐승으로 여겨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점을 특별히 지적했다.”

▲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정의론>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존 롤스는 “민주 국가가 전쟁을 진행하는 목표는 적대국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지속적 평화를 달성하는 데 있다”면서 “현재의 적은 반드시 이후의 정의와 평화를 함께 누릴 동반자로 여겨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민주 국가를 자처한다면, 비록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처럼 적대국의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전면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도 적대국 인민의 기본적 인권도 반드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핵무기는 불가피하게 적대국의 전체 주민의 생존을 공격 목표로 삼기 때문에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 연방 우정총국은 1995년 8월 6일 미국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에 버섯 모양의 원폭 경관이 인쇄된 우표를 발행해서 이른바 “핵 승리” 50주년을 기념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이 계획은 시민 사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철회되었지만, 무기 산업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미국 정부의 비틀어진 ‘전쟁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국가 이익을 위해서 타국민의 인권 유린과 희생을 접어두고 오히려 경축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용기다. 마치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 군대가 인디오들을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짐승’으로 취급해서 죄의식 없이 학살한 것과 다름없다.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아방타방’(我方他方)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 있다. 군사 정권 세력을 타(他)로, 민주화 세력을 아(我)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는 ‘저쪽 편’(타방)은 ‘우리 편’(아방)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방타방을 분명히 가를수록 ‘인간(성)’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남는 것은 무자비한 ‘투쟁’뿐이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 가운데 하나가 가톨릭교회의 ‘정당한 전쟁론’이다. 야만족의 침공으로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선의를 위한 것이라면’ 대응 전쟁을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판단하는 사람들이 갖는 ‘선의’(善意)의 기준이 모호하고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빚어진 교회사적 야만이 십자군 전쟁으로 나타났고, 마녀 처형으로 드러났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힘이 당대의 지배 권력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전쟁론이다.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대주교가 베트남 전쟁 당시에 무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축성했다는 일화는 전쟁에 신성을 부여하는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잘못된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도러시 데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트루먼(truman)은 참사람(trueman)인지는 모르지만, 참 하느님은 알지 못했다.”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가 ‘아버지’라고 고백했던 하느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 주라던 예수, 겉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도 내주라던 예수는 트루먼 대통령과 다른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불렀다.

이 하느님은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와 인연이 없는 분이다. 오늘 뉴스를 보니,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외국 함정이 참여하는 합동 군사훈련이 지난 2월에 완공된 제주 강정 해군기지에서 실시될 예정이었는데, 평화활동가들과 주민들의 반발로 훈련 개막 하루 전에 진해군항으로 장소 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훈련에 참가한 일본 함정은 진해에 입항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게양했다. 해군의 설명에 따르면, “함정은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의 해군기를 달지 못하게 하는 건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사실상 미일한국 합동 군사훈련이 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동북아시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강정 해군기지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는 일본의 전략과 맞물려 있는 것이라면, 강정 해군기지는 결국 그동안 평화활동가들이 주장해 온 바와 같이 ‘평화의 섬’이 아니라, ‘동북아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군사력과 강화가 아니라 군비 축소와 무장 해제를 통해서만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는 역대 교종들의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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