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하느님과 인간-신학적 인간론', 서강대출판부, 2014

한 해에 몇 번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새로운 달력을 걸면서 한 번, 설에 떡국 먹으면서 또 한 번....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달력의 마지막 장을 아직 한 장 남기고 벌써 새롭게 시작할 차비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따라서 한 해를 살아가는 전례력이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한 해는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첫 주에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새로 시작되는 전례의 달력을 따라서 마음을 가다듬고 태어나는 아기 예수를 누일 마음의 구유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는 12월 25일, 동방 정교회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낸다. 하지만, 예수가 언제 탄생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고,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동지 다음날 지내던 태양신의 축제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바꾸어서 기념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어쨌거나 해의 소멸을 상징하는 동지를 넘어서 다시 소생하는 해와 함께 아기의 모습으로 땅에 오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축하는 것이 성탄이다.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흰 눈이 내리고 썰매를 탄 산타는 예수의 탄생과 전혀 관계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아야 한다. 비록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다 잠든 아이일지라도....

예수는 어떤 모습의 아기였을까?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신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르 12,17)”

▲ '천지창조'의 일부, 미켈란젤로.(1512)
세금논쟁으로 알려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에게 시비를 건 사건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예수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였다. 동전에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서 그 돈이 황제의 것이듯이, 하느님이 불어 넣은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인간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음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예수, 그 자신만 아니라, 인간의 모습에는 신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염기서열이나 게놈 지도 어디에 그 신비가 숨어 있는지는 아직 밝혀 내지 못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에 하느님의 손길에서 아담의 손으로 그 생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아마도 영화 E.T 에서 아이들과 손가락을 맞추는 외계인의 그 유명한 장면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2015년 대림을 시작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신에게서 우리는 어떤 아기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혹은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듯, 신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신을 기다리는가? 하느님과 어떤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준비하는가? 더 나아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로 만나기를 기대하는가?.... 대림절을 준비하려는 이들을 위한 작은 안내서들이 성탄선물들과 함께 서점의 가판대를 점령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만나서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가며 읽고 있는 책이 있으니, 이번 성탄에 인간이 된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이들은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어서 소개한다. 맛있는 성탄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레시피가 적힌 요리책이 필요하듯이....


팔순을 넘긴 원로신학자의 지혜와 명쾌함이 가득한 책을 이 대림시기에 소개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고 영광이다. 맛있는 요리를 위한 첫째 조건은 싱싱한 식재료이듯이, 신을 만나기 위한 첫걸음부터 시작한다. 바로 언어의 문제다. 21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신앙 고백문을 외우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을 고백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려 준다.

그래서 아주 쉬운 말로 풀어 쓴 신앙 레시피는 꽤 어려운 신학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신선한 언어를 제대로 맛보고 누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적 감각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신을 만나고 경험한 신앙을 살아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마치 온갖 조미료에 적응한 혀의 감각을 회복시켜서 자연의 맛을 느끼도록 만드는 과정만큼이나 어렵다.

▲ 서공석,"하느님과 인간-신학적 인간론", 서강대 출판부, 2014
신학이 하는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우리가 제기하는 물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하느님을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단어조차도 우리는 예수의 역사 안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75쪽)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초월적 신비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역사 안에 드러난 그 흔적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고백을 겸손하게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그와 관계를 맺은 이들의 경험 안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그 맛을 경험하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다. 바로 예수가 만나서 맛보고, 우리에게 전해 준 그 맛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일차로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들 안에 스스로 나타내셨고, 또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안에 당신을 나타내셨다. 이차로 하느님은 예수라는 한 인물 안에 당신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삼차로, 하느님은 사람들의 신앙생활 안에 당신을 나타내신다. 그것이 성령이다. 따라서 구약성경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도, 성령 안에도 모두 같은 하느님이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현존하는 양식이다.(93쪽)

예수의 경험을 통해서 그 신을 경험한 이들은 예수의 방식을 따라서 경험을 표현한다. 마치 어릴때 익힌 언어로 경험과 인식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모국어는 나를 만들고, 나는 모국어를 통해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이성 안으로 쏙 들어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신비이니, 이 시대에도 살아 있는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성령은 또한 기쁨의 원천이시다. 아버지에 대해 가상적 인식에 머무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이 소중하기에 세상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과 이웃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가상적 욕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계속 불평하고 낙담하며 산다. 성령은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 상징성 안에서 보게 해 주기에 기쁨의 원천이다. 성령은 세상과 타인을 그 차이와 아름다움 안에, 그 한계와 불행을 지니고, 우리 앞에 자유롭게 있도록 하신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보게 하신다. (134쪽)

맨몸으로 태어난 신생아에게서 신의 모습을 찾겠다는 인간의 기대는 참으로 무모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꾸밈이 없는 그 핏덩이에게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진실이 무엇이기에 그 많은 신들을 두고서 나와 같은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찾겠다는 것인가? 어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신을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이렇게 불친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간절함의 뿌리를 찾아나가면 어느 즈음에서 나를 향해 찾아오는 신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흔히들 하느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인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하느님을 또 차별의 동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초대하는 분이시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잔치의 비유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차별을 없애는 우리의 노력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다. (238쪽)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만나는 사람이다. 또한 예수의 탄생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고 한다. 태어나는 인간들의 한계 안에서 자신을 낮추어 드러내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은 인간세상의 고통을 없애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딜 만한 힘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안에는 이미 신적 가능성이 있음을,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기쁨과 함께 알려 주기 위해서 말이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베풀었기 때문이다. 신학이 말하는 무(無)는 허무로 끌고 가는 힘이며 죽음의 힘이다. 존재는 하느님이 창조하셔서 허무의 심연 위에 떠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혀 다른 분인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인간됨이라는 과정에 있다 그 존재가 자존(自存)을 지향하면, 자기 존재의 근원인 전혀 다른 분 앞에 맞서서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294-295쪽)

이번 대림을 새로운 레시피를 따라서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과 전혀 다른 신, 그 신을 인간 안에서 만나는 것, 역설적으로 그 신의 탄생 안에서 민낯의 헐벗음으로 탄생하는 나를 만나는 것은 인간의 뿌리를 찾아 내는 것이다. 삶의 온갖 조건들과 한계들을 걷어 내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 혼자 높아지거나 혼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한발을 내딛는 소박한 용기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 그 바보스러움이 바로 우리 얼굴에 새겨진 하느님의 민낯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21세기의 언어로 쓰여졌음에도 쉽지 않은 신학적 인간학을 곱씹으면서 예수신앙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치유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책의 마지막 한 장은 테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 사상과 그리스도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신학적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샤르댕의 신앙 레시피는 과학이 발전하고 신학과 함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 협력하는 이번 세기에는 크게 유행할만한 방법론이라고 하겠다. 지난 세기의 허물을 벗고 보다 더 섬세하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신을 시도하려는 이들에게만 슬쩍 추천한다.

최우혁 (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립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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