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세븐’ - 4]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인천에서 제주를 향하던 연안여객선 세월호가 뒤집어졌다. 탑승객 476명을 싣고 가던 세월호는 이틀 만에 완전 침몰하여, 총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남겼다. 1998년 일본에서 ‘나미노우에’라는 이름으로 18년간 운행하던 세월호는, 폐선 직전 청해진 해운에 인수되었다. 20년이던 여객선 운용 시한을 30년으로 늘리도록, 규제가 ‘완화’된 덕분이었다. 또한 증축을 통해서 중량은 239톤이, 탑승인원은 116명이 늘어났다. 사고 전날, 인천발 여객선 10척 중 9척은 안개로 인해 출항을 취소했지만 세월호는 ‘용감’하게 출항을 강행했다. 운항 관리 보고와 달리, 거의 두 배인 1157톤의 화물을 실었으며, 그나마 바닥에 제대로 묶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선원이 저임금 비정규직이었으며, 선장마저도 월급 270만 원의 1년 계약직이었다.

칠죄종에서 말하는 ‘탐욕’은, 간단히 말해서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채워지지 않는 재물에 대한 욕구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해 왔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을 구가하고 있다. 이 사회는 이미 탐욕과 축재를, 이윤추구와 경제성장이라는 언어로 탈색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누가 더 많은 돈을, 부자가 되는 것을 싫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탐욕이 일곱 명의 딸을 낳는다고 하였다. 바로 거짓, 사기, 위증, 폭력, 냉담, 불안, 배신이다. 세월호 사고와 그 이후의 구조수습 과정에서 전 국민이 목격했던 모든 슬픈 일이, 이러한 탐욕의 일곱 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리하게 배를 운용, 증축한 ‘사기’, 화물 중량과 결박 여부에 대한 ‘거짓’, 악천후 속에서 출항해야만 했던 ‘불안’, 승객 안전에 대한 ‘냉담’, 구조 과정에서의 ‘배신’과 ‘폭력’, 조사 과정에서의 ‘위증’까지. 이 모두가 탐욕의 결과다.

4세기경, 로마의 시인이었던 아우렐리우스 클레멘스 프루덴티우스는 칠죄종(seven deadly sins)과 상대하는 일곱 가지 덕목을 사이코마키아(Psychomachia)라는 자신의 시에 제시하였다. ‘사이코마키아’란 영혼의 전쟁을 의미하는데, 그가 말한 일곱 가지 선한 덕목을 칠주덕 혹은 칠추덕(seven cardinal virtues)라고 하기도 한다. 이 중 탐욕과 싸우는 건강한 영혼의 덕목이, 바로 사랑(caritas)이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존경, 책임, 보살핌, 건강한 호기심’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혹은 인류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등 다양한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익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에게 온전한 관심을 주며, 책임감을 느끼고, 깊이 이해하려고 하며, 따뜻하게 돌봐 주는 것이다.

▲ '공감', 존 조지 브라운.(1885)

정신의학적 면에서, 건강한 사랑은 애착 경험, 그리고 공감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 정신과 의사인 대니얼 스턴은 ‘자기조절적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느껴지는 자기 감각과 자기 발견이라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타인의 눈을 통해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미래의 모든 관계를 내적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프롬은 사랑이 ‘개인과 세계 전체의 관계를 결정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한 것이다. 사랑은 타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 핵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다.

건강하지 못한 다섯 가지 성격 유형이 있다. 현 상태를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용적 성격이나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착취적 성격, 혹은 뭐든 쌓아 두려는 저장적 성격, 평판에만 골몰하는 시장적 성격, 그리고 죽음과 질병에 집착하는 죽음애적 성격 등이다. 반면 건강한 성격도 있는데, 프롬은 이를 세상과 ‘하나가 되어’ 고독과 분리에서 벗어나려는 열린 생산적 성격이라고 하였다. 즉 ‘가면’을 쓰지 않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널리 나누어 주려는 마음인데. 이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탐욕을 이기는 덕목이라고 노래한 로마 시인의 말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 이해, 관심, 보살핌 등의 가치와 함께 할 수 없다. 세월호 사고를 비롯한 현대 사회의 다양한 복합 기술재난은 바로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뜻에서 세월호 사고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치료, 명예회복,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는, 그것이 과연 ‘경제적 이익’이 되는가라는 잣대에 의해서 재단되고 있다. 보상금 규모나, 예인에 드는 비용에 대한 논란도 이러한 평가의 연장선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자신의 책에서 북아메리카 콰기우틀 족의 파틀래치(포틀래치) 축제를 소개한 바 있다. 추장이나 우두머리 역할을 가진 인디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탈탈 털어서 축제를 여는 것이다. 이 축제를 하면서 모두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는 남아 있는 물건을 다 부수기도 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낭비인가 싶지만, 그들은 포틀래치를 거쳐야만 부족 안에서 사회적 존경을 유지할 수 있다. 콰기우틀 족은 재산이 많은 권력자를 존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자를 그들의 우두머리로 추앙한 것이다. 진화생태학자 파울 에를리히와 심리학자 로버트 온스타인은, 이러한 파틀래치 축제를 언급하면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즉 공감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세월호 사고 2주년이다. 많은 사람이 죽고, 또 몹시 슬퍼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과 물질적 탐욕이라는 절대적 기준이 작동하는 이 사회가, 그뒤에 얼마나 변화했는지 의문이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우리의 사랑은,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도 ‘사랑’스러워져야 한다. 세상의 구조적 모순을 온 몸으로 경험한 그들에게, 기형적으로 증축되고 무리하게 운항하는 이 사회를 이제 조금씩이라도 회복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스턴의 말처럼,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다.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성 안드레아병원 영성과 사회정신연구소 연구소장
성 안드레아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돌보는 한편,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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