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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절망 속에서 우리를 일으키다(요한 20,1-18)- 조현철

올해 부활절은 예년에 비해 상당히 이른 편입니다. 우리는 춘분이 지나고 보름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냅니다. 춘분과 보름, 모두 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춘분, 낮과 밤 길이가 같습니다. 춘분을 지나며, 낮이 밤보다 길어지고, 빛이 어둠보다 많아집니다. 보름, 달이 가장 밝을 때입니다. 빛, 부활의 상징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부활절은 요즘과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어느새 봄, 해가 길어졌고 빛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 눈을 돌리면, 그런 생각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현실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 한밤중입니다. 그만큼 절망의 골도 깊고 넓습니다. 끔찍한 학대로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가는 어린 생명들, 생계형 알바가 70퍼센트에 이르는 찌들 대로 찌든 젊은이들의 삶, 여전히 길거리를 헤매는 노동자들, ‘쌀’마저 버린 나라의 농민들, 우울한 노년, 바닷물 속에 304명이 죽어 나가도, 물대포로 70살 농민이 사경에 빠져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부, 밀실 야합으로 ‘퉁’쳐 버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내용 테러방지법, 거듭되는 안보 장사, 선택지 없는 선거. 얘기하면 끝이 없고, 요약하면 ‘헬조선’입니다.

봄은 왔지만, ‘봄’이 없습니다. 생기는커녕, 무기력만 가득합니다. 바로 이런 때, 우리는 부활절을 지내고, 축하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부활이 무엇인지, 어떤 상태인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부활과 관계가 없게 됩니다. 부활은 그런 사건입니다. 그런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아마도 희망을 뜻할 것입니다. 사랑이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세상의 끝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허나, 죽음과 절망의 기운이 이토록 짙게 드리운 현실에서 그런 희망이 가능할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 현실 도피용 마약에 불과한 건 아닐까? 올해, 부활을 말하기란 몹시도 곤혹스럽습니다.

   
ⓒ박홍기
예수의 죽음을 옆에서 겪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와 만난 뒤, 마리아의 삶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보여 주는 새로운 삶에 매료되었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벅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예수에 이끌려 찾아온 군중들,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겁에 질려 숨어 버렸습니다. 마리아도 당혹했고 겁에 질렸을 것입니다. 허나 마리아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건의 현장 속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예수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갔습니다.(요한 20,1)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 때문에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설사 들어간다 해도, 거기엔 예수가 아니라 그의 시신 밖에 없다는 걸.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그러니, 예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마리아가 무덤에 간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왜 어두운 새벽에 무덤으로 갔을까? 예수의 시신 곁에 있으려고. 사랑! 예수를 향한 마리아의 사랑. 거기서 나온 안타까움과 애틋함. 그밖에 무엇이 마리아를 절망적 상황에서 무덤으로 이끌었을까? 절망에 빠진 마리아를 사랑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가 묻힌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랑은 절망을 떨치고 행동하게 합니다. 한데,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더 절망스러운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무덤에 달려온 제자들은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마리아는 무덤가에 남습니다. 예수가 이미 부활했고, 부활한 예수를 만날 것이라 예상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의 시신이 없어졌기에 남았습니다. 뭘 해야 할지 알아서가 아닙니다. 거기가 예수의 마지막 자리였기에 남았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마리아가 떠나지 않고 버티게 해 준 것,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활한 예수와 만남, 마리아가 예수에게 쏟았던 사랑의 귀결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간 예수 본인은 어땠을까? 이미 말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허나, 우리는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 억눌린 이들에게 깊은 관심과 연민을 보였습니다. 하늘의 참새와 들의 꽃도 지극 정성으로 돌보시는 하느님! 예수는 그들도 이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했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그들을 억압하고, 죄인으로 내모는 온갖 제도와 규정, 이를 비호하는 당시의 종교, 정치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예수가 가는 길, 박해의 그늘이 점점 짙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결코 승산이 있어, 그 길을 걸어갔던 것이 아닙니다. 죽은 뒤에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체포되기 전, 예수의 깊은 고뇌는 이해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런 예수를 온전한 ‘사람’이라 보기도 힘듭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예수는 그 길을 끝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갔습니다. 상황은 절망으로, 마음은 공포로 가득했지만, 사랑이 예수를 그 길에서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예수를 일으켜 세웠던 것, 공포 속에서 예수를 버티게 해 주었던 것,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 예수가 사람들에게 쏟았던 사랑의 귀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활을 말하기 전에, 우리의 사랑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 소중한 피조물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타자를 향한 열린 마음이 제대로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마음,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면, 어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묻혔던 곳, 예수가 걷던 길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하면, ‘또 다른 우리’가 찾아와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승산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끄는 곳에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거기서 일어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 바로 사랑의 귀결입니다.

생각을 마치고 나니, 바깥 풍경이 다르게 들어옵니다. “마른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순이 돋는구나. 그래, 곧 망울이 터지고 꽃이 피겠지.” 바로 얼마 전의 겨울, 나목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변화입니다. 사랑으로 예수가 고통을 감내하고 묻혔던 곳, 사랑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찾아가 머물렀던 곳, 그곳으로 우리도 가야 되겠습니다. 사랑으로, 아픈 현실 한가운데, 우리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습니다. 변화는 거기서 분명 일어날 것입니다.

봄입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탈핵천주교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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