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임마누엘을 생각하는 도보순례에 부쳐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교회는 우리에게 회개를 권유하며, 구원으로 초대합니다. 바로 지금이 구원을 위한 때라고 말합니다. 바로 다음 날, 교회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5.19).

사람은 누구나 생명과 행복을 원하지, 죽음과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당연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굳이 왜 이런 당부를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했을까? 오늘 우리의 현실에 견주어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곱씹어 봅니다. “누구나 생명과 행복, 생명과 축복을 원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생명’을 선택하고 있을까? 생명, 행복, 축복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음, 불행, 저주로 가는 그런 길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명을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 귀 기울여 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것이 사람이 생명을 얻는 원리입니다. 사람은 이토록 ‘역설의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도 사람이 ‘역설의 존재’임을 암시해 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기를 내놓습니다. 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울 때, 비로소 사랑이 됩니다. 자기를 고집하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육화는 하느님이 진정 사랑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자기를 비우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에게도 바로 이 사랑의 원리가 내재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역설의 원리에 충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되어야 할 그 존재’가 됩니다. 우리 또한 비움으로써, 충만해지는 역설의 존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행복해지고, 축복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을 채우려고 할수록, 우리는 우리 본연의 모습과 멀어집니다. 죽음이고 불행이고, 저주입니다.

인간 실존을 뜻하는 ‘existence’는 라틴어 ‘ex’와 ‘sistere’의 합성입니다. ‘ex’는 ‘밖’을 뜻하고, ‘sistere’는 ‘서다’라는 뜻의 ‘stare’에서 왔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자기 밖에 서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 밖에 설 때, 비로소 되어야 할 그 존재가 됩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행복해지고, 축복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인간을 이렇게 이해하면서, 오늘 우리의 세태를 다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거스르는 행태, 삶의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나를, 나만을 채우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나를 가능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야겠다고 눈을 부릅뜹니다. 한쪽은 채우고 또 채웁니다. 하지만 허기는 계속됩니다. 아니, 채울수록 허기가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채울수록, 더 게걸스러워집니다. 그렇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 뺏기고 또 뺏겨 밖으로 내몰립니다. 하지만 채우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들을 자신의 생명과 행복과 축복에 대한 장애물로, 그래서 없어져야 할 대상 정도로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사회 전체가 생명과 행복과 축복이 아니라, 죽음과 불행과 저주의 길로 내딛고 있습니다.

▲ "백남기 농민 살려내라 도보순례" 를 시작하며 전남 보성역 앞에서 도보순례단이 출정식을 하고 있다.(사진 제공 = 조현철)

세상이 현재 질주하는 방향은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중 상당수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세상의 길을 추종합니다. 이 길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 유지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세상 한가운데서 외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소수입니다. 사람이 사는 법, 사람이 역설의 존재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비우고 놓을 때 우리는 생명과 행복을 얻는다는 역설적 원리를 자신의 삶에서 깊이 체득하는 이들은 필시 농민일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연의 이치에 이미 사람이 사는 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지속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내놓고 죽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순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바로 농부입니다.

자기를 비워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생명과 행복과 축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삶으로 마음 깊이 새겨 온 한 농민이 이를 세상에 외치려고, 어느 날 세상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그렇게 가면 결국 우리 모두가 죽는다. 함께 살자!” 자기를 채우는 데 여념이 없는 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것은 직사 물대포의 강력한 타격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쓰러졌고, 시간은 아직도 그 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람에게 직선으로 쏘아 댄 물대포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가겠다.” 허나, 이 길은 죽음과 불행의 길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죽음의 길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눈먼 질주를 막아야 합니다. 허나, 막을 수 있을까? 현실의 변화를 일구어 낼 수 있을까? 저 무지막지한 금력과 권력에 맞서 승산이 있을까?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뒤돌아볼진대 세상에서 변화는 분명히 있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은 그냥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건들 뒤에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이름 없는 많은 이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조그만 노력들이 모여서 변화를 위한 때, ‘카이로스’(기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한순간에 세상을 끓게 만듭니다. 끓어오른 물은 우리를 억누르던, 그토록 강고하던 뚜껑을 단숨에 제쳐 버립니다. 변화는 한 순간에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냥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외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변화를 위한 헌신과 인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외칠 때 외치되, 일상적으로는 각자의 삶터에서,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다양한 수준의 공동체가 생명의 원리,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도록, 그렇게 변화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 땅에 또 다른 ‘백남기’가 여기 저기, 수없이 많아질 때, 물은 틀림없이 끓어오를 것입니다. 끓어오른 물이 세상에 길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생명의 길, 행복의 길, 축복의 길, 모두가 사는 길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2월 11일에서 27일까지 17일간, 보성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도보 순례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과 마음으로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 낼,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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