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내 할아버지가 겪은 전쟁

나의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상이군인이다. 지금도 할아버지의 정강이에 관통상 흔적이 남아 있다. 어려선 그런 사실을 몰랐다. 내게 할아버지는 그저 농사를 열심히 짓는 촌로였다. 자식들이 소를 팔자고 해도 할아버지는 소 키우는 게 유일한 낙이라며 손사래만 치시던 분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 년에 한두 번씩 서울에 올라와 데모에 참석하셨다고 한다. 농민 집회가 아니라 ‘애국보수단체’들이 주최하는 극우 집회였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박멸하자 이야기한 ‘좌파’에 외손자도 포함되어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하셨을 것이다. 그저 내가 명절에 내려가면 외손자가 내려왔다고 많이 반가워해 주실 따름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할아버지는 내가 외가에 방문하면 항상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먼 친척들이 오면 이름 알려진 대학을 졸업한 손주라며 나를 치켜세워 주기도 하셨다.

할아버지의 젊은 날들

징병제 관련 공부를 하면서 상이군인으로서 할아버지가 겪은 경험이 아무래도 많이 궁금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할아버지는 방 안에서 TV 보는 걸 유일한 소일거리 삼아 지내고 계시는데, 한 번은 할아버지께 절을 드리고 옆에 앉아 함께 TV를 보다가 요즘도 집회에 자주 나가시냐고 여쭸다. 갑자기 궁금했다. 명절이면 이렇게 옆에 앉아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정치적인 거리만큼은 너무나도 멀다는 게 참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많이도 여쭸고, 할아버지 역시도 다른 친척들은 별로 관심 있게 듣지 않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만주 공장에서 일을 하던 무렵 고향 우체국에서 징집 통지서가 날아왔다고 말씀하실 때 나도 모르게 '1944년이군요!'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선 흥이 나신 듯이 '응. 왜정 끝나기 1년 전이니까 그렇지.'라고 답하셨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땐 이 정도에서 말이 끊겼지만 대화가 거듭되면서 할아버지는 일본군에 끌려갔던 과정, 한국전쟁 개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북한에 대한 적개심 등에 관해 들려주셨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점차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 6.25전쟁 당시 서울 마포에서의 시가전. 오른쪽에 하수구에 숨어 저항하던 북한군이 죽어 있다.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아내와 결혼을 약속한 직후에 할아버지께 함께 인사를 드리던 날, 두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씀드렸다. "우리 할아버지, 힘드셨네요."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답하셨다. "응. 나 좀 힘들었어...." 당신의 외손자가 병역거부자라는 걸 안다면, 할아버지는 그날의 시간에 큰 배신감을 느끼실지 모른다. 내가 병역거부자이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겪은 일들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리는, 할아버지 생전에 없다.

할아버지는 총상을 입은 뒤에 상흔을 그저 팔자려니 받아들이곤 조용한 시골 농부로 살아오셨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할아버지처럼 부상 정도가 경미한 상이군인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한다는 광고를 TV에서 봤다고 하셨다. 2000년이 되어서야 국가유공자가 되셨으니 약 50년 동안을 아무런 보상 없이 살아오신 셈이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 비로소 보상을 받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불만이 크다. 김대중 정부가 5.18민주화운동 참가자들에게 국가유공자 지위를 주려고 상이군인들도 곁다리처럼 껴 줬다고 믿고 계시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을까? 구체적으로 답해 주지는 않으셨지만,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뒤에 연락이 온 보훈단체의 어느 모임을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결과다. 할아버지가 그간 느꼈던 국가에 대한 박탈감이 정작 국가유공자 지정에 나선 김대중 정부에게 쏠려 버렸으니. '군인들이 집권했으면서도 할아버지를 그간 그렇게 버려둔 건가요?'라고 대신 화를 내고 싶었다. 언젠가 할아버지의 삶을 이야기에 담을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그리 말하고 싶다.

전쟁터보다 더 끔찍했던 정치

문득 할아버지의 전쟁 경험이 궁금했다.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들고 폭탄이 쉼 없이 터지는 전쟁터를 나는 겪어 본 적이 없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느꼈던 두려움에 공감하고 싶었다. 제대한 뒤에도 군대에서 겪은 꿈을 꾼다거나 하지 않으시냐고 여쭸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다. “군대 생각하면 전쟁하는 거보다 군대 생활하는 게 배고파서 더 힘들어....”

할아버지는 군대 생활이라는 게 아주 징그러웠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소고기 다리 하나가 나와도 위에서 높은 사람 순서대로 이리 빼먹고 저리 빼먹는 통에 일반 병사들은 기름만 조금 떠 있는 국물밖에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쌀만 해도 대대장이 빼먹고 소대장이 빼먹고 막판에 와서는 분대장까지 빼먹고 나면 일병, 이등병은 기껏해야 한 숟갈씩 얻어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전쟁터보다 끔찍했던 군대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사람들이 우리나라 정치를 그렇게 잘못했어.”

할아버지에겐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전투보다 끔찍했던 군대생활 자체가 전쟁이었다. 마음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붙들어 놓고 먹을 것 가지고 그리 장난질을 치던 저 위의 높은 양반들이 만든 지옥이었다. 일상을 전투보다 더 끔찍한 전쟁터로 만든 것도, 전쟁이 끝난 뒤에 부상당한 제대군인들더러 그저 알아서 살라며 내팽개친 것도 ‘정치’였다.

그때 그 정치가 오늘날 다시 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국민들이 각오만 해 준다면 북한을 금세 쓸어 버리겠다고 공언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전쟁을 다시 치르자는 것인가. 저들은 지난 50년을 다시 반복하고 싶은 것일까. 지금 전쟁을 운운하는 저들은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른다.

요즘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서울로 시위하러 가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고 당부하신 말이 있다. “이 나라에 전쟁은 다시 나면 안 돼.” 나는 그 말씀에 일부러 크게 끄덕였다. 비록 그에 대한 방법이 다르지만, 할아버지가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50년간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할아버지가 힘주어 전해 준 당부였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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