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진실의 생산 과정

징역을 살 때 내게 제일 먼저 떨어진 일은 사동소지였다. 감옥 복도를 오가면서 방 안에 갇혀 있는 재소자들 심부름을 해 주는 일이었다. 평일에는 엉덩이를 의자에 대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날이 많았다. 하지만 주말엔 한가해서 꾸벅꾸벅 졸 만큼 짬이 나기도 했다. 공휴일엔 면회나 운동시간이 없어서 재소자들이 온종일 방 안에만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휴일엔 꼭 한두 번씩 큰소리가 났다.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던 사람들끼리 다툼이 생기는 건데, 별 거 아닌 걸 가지고 논쟁을 하다가 싸움으로 번진 경우가 많았다. 싸움거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퀴즈 프로그램을 보다가 역대 월드컵 우승국가나 조선 왕 이름을 두고 크게 싸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여름 징역과 겨울 징역 중 뭐가 더 고되냐는 식으로 붙는 건 애초부터 답도 없었다.

‘심리’를 붙던 감옥

감옥에선 이런 싸움을 두고 ‘심리’를 붙는다고 말했다. 법정에서 붙는 심리는 판사와 배심원이라도 있지, 좁은 방에서 심리를 붙으면 대체로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었다.

사동복도에서 앉아 큰소리 나는 걸 자주 접하다 보니 웬만해선 논쟁을 피하려고 했다. 나도 물론 심리 붙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사동소지로 같이 일하던 형은 자신이 KTX에 다녔다면서 승무원들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정규직 보장된다는 약속 믿고 입사했으니 회사가 약속을 지키라고 싸울 수 있지 않겠냐고 답했던 게 실수였다.

그 형은 그런 약속 없었다며 반박했다. 증거도 없으니 그만 알겠다고 했더니, 그 형은 내게 그런 약속 없었다는 거 인정하는 거냐고 연신 확인했다. 알겠다는 말이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답했지만 결국 서로 얼굴만 붉히고 끝났다. 그런 경험을 한 뒤부턴 애초부터 아예 논쟁거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감옥 바깥이었다면 인터넷 검색으로 금방 답이 나왔을 일들이었다. 감옥 안이니 참조할 게 없었다. 교도관들이 답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교도관이 잘못 알고 있는 거면 어떻게 하냐며 다시 싸우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서로가 함께 신뢰하며 참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는 상황에선 어떤 것도 진실로 인정될 수 없었다. 진실은 생산되지 않고 오직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뿐이었다.

출소를 하니 감옥에서 심리 붙는 식으로 말싸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기뻤다. 2002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했다는 건 포털 사이트에 쳐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조금 더 복잡한 문제는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책을 찾아보면서 진실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사회라는 곳에 나왔다고 믿었던 그때는 그렇게 기대했다. 그런 기대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해 보기로 했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사회 없이 번지기만 하는 갈등

그러나 최근 들어 마치 감옥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때가 잦아지고 있다. ‘이 장면을 어디서 봤지?’ 싶은 기시감이 드는 때면 어느새 감옥 복도에 앉아서 듣던 싸움들이 떠오르곤 한다. 믿고 참조할 수 있을 무언가는 사라져 버리고, 진실을 생산하는 절차는 찾아볼 수가 없는 이곳이 사회인지 감옥인지 헷갈릴 때가 왕왕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면서 자신은 정작 책을 읽지도 않았다며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냐’고 태연하게 말할 때가 그랬다. 반대로 박유하 교수가 자신은 인정받는 학자이기 때문에 본인의 책 역시 ‘학문의 자유’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동어반복식 주장을 하는 때가 그랬다.

여기서 진실을 묻고 따지는 절차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합의된 방법과 절차에 따라 시간을 두고 따져 가는 이야기가 실종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에선 절차는 작동하지 않고 그저 어느 편인지 묻는 ‘선험적 당파성’만 자리 잡아 버렸다. 이런 상황이 비단 “제국의 위안부”만 두고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차 없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판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사라졌다. ‘당신은 그것이 어째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믿는 그 진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된 것인가?’, ‘그러한 과정은 타당한가?’ 등등.

감옥에선 불가능했지만, 감옥 바깥 사회에선 이런 질문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출소하던 날 그렇게 기대에 부풀었나 보다. 하지만 그 짧았던 해방감이 이제 많이 사그라져 버렸다. 어쩌면 사회 그 자체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밑도 끝도 없는 큰소리만 오고 가는 가운데 이런저런 갈등들이 중재자 없이 번지다가 끝내 법정으로 향하고만 있다. 세상이 점차 만기 없는 감옥이 되어 가고 있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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