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약자의 편에 서는 지식인’이라는 위선을 넘어

‘약자의 편에 서는 지식인.’ 이 말이 떨떠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출소를 한 직후에 어느 동문회 자리에 갔다가, 유학을 다녀왔다는 어느 ‘학자’님이 내게 웃으며 건넨 말이 시발점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안 그래도 너 같은 애들 도와주려고 글 하나 쓰고 있어.” 고맙다고 답을 했어야 할까? 돌아오는 길에 헛웃음이 났다. 난 그런 도움 요청한 적도 없고, 도움될 거라 기대한 적도 없고, 실제로 여태껏 그런 글로 도움을 받아 본 일도 없다.

그때까진 대학원에서 공부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 때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대학원에 간 뒤에도 그날 느꼈던 떨떠름한 느낌을 잊지 못했다.

서볼턴의 말이 들리지 않는 이유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 본격적으로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누군가의 기억을 대신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울 수 있었다. 식민주의 비판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이란 학자가 던진 ‘서볼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이,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듣는 귀를 문제 삼는 이야기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 건 꽤나 나중의 일이었다.

서볼턴(subaltern)이란 주류사회에서 워낙 주변으로 밀려나서 민족이나 인종, 노동계급 등의 범주로 한 번에 대표되지 못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같은 ‘잡것들’의 경험은 말 그대로 듣도 보도 못한 것이기에 적절히 해석될 언어가 없었다. 해방 이후 40여 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위안부’ 생존자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이 겪은 일을 지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들려주기도 했지만 당사자의 행실 문제로 치부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2009년 12월 평화헌법 9조 아시아종교인 대회 참석자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가했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서볼턴의 기억은 상식과 통념에 익숙한 사람들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경험들이기에 아무리 말을 해도 이런 대답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해 봐.” 내게 병역거부 이유와 관련해 ‘종교적인 이유냐 정치적인 이유냐’고만 묻던 사람들에게, 양자택일 대신 내 생각을 들려주면 자기 질문을 피하냐는 말만 되돌아오던 때, 그런 한계를 많이도 느꼈다.

학자들은 대부분 ‘서볼턴은 말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서 그대로 멈추곤 한다. 학자들은 자신들의 말만은 뚜렷하게 해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의 말은 서볼턴의 말과 달리 명확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자신들을 해석자의 위치에만 놓았다.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다면 좋겠다던 전태일의 외침을 이야기할 때도 그들은 언제나 ‘대학생 친구’의 입장에서만 미안해 할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듣는 자가 아니라 서볼턴으로서 말해야 하는 자라고 인식하게 된다면 미안함은 이내 절박함으로 바뀐다. 최근 창립한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를 통해 만난 내 또래 역사연구자들이 특별하게 느껴진 까닭도 이런 절박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 중에 만난 이들 ‘신진 연구자’들은 국정화 반대를 넘어서 역사학계 자체의 폐쇄성에 크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학원생으로서 공부를 주업으로 삼고 있지만 또한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기엔 ‘임노동’과 ‘학술작업’ 같은 기존의 말들은 충분하지 않았다.

‘잡것’으로서의 연구자

자신들의 사정을 대변할 의향조차 없는 기존의 학계를 대신해서 새로운 학술운동 단체를 만들어 보겠다고 해도, 1980년대 학번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대중동원 규모에 미치지 못해서 시작부터 실패라고 평가절하를 할 뿐이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신진 역사연구자들은 30년 전과 또 다른 현실에 직면해 분투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적절히 설명해 낼 언어를 찾지 못해 갑갑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매일매일 일상 속에 겪고 있는 장애가 남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면 인간성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것마냥 치부되는 법이다. 국정화 사태를 포함해 공론장이 점차 사라지면서 후속세대가 발언권을 가지기가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진 역사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마저 부정당할 위험을 직감하고 있다. 이들이 ‘만인만색’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대안적인 공론장을 만들고자 나선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답답함과 절박함이야말로 내 또래 ‘신진 역사연구자’들을 윤리적으로 이끌 것이다. 이들이 오늘 느끼는 비루함과 초라함은 연구자로서 타인의 기억과 경험을 다룰 때, 특히 그간 공식기억에서 ‘잡것’으로 불리며 주변으로 밀려났던 이름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 그들의 입장에 서서 고통을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자 애썼던 경험은 자신 속의 타자성을 일깨우며 동시에 타자와 동질성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이런 이들이 모인 ‘만인만색’에 참여해 함께 공부할 수 있어 반갑다. ‘약자의 편에 서는 지식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잡것’들과 꾸준히 모여 연구해 나갈 수 있을 자리가 계속 되길 바라 본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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