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그의 소송을 만류하지 못했던 까닭

‘데이트 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칼럼니스트 A에게 한동안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안부 인사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몰랐다. 잘 지내냐는 인사가 어울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가 ‘가해자’라면 위로하거나 응원하는 건 부적절했다. 한참을 연락 없이 지냈다. 그러다 문득 용기를 내서 안부를 물었다. 자중하며 지내겠다며 글쓰기를 일체 그만둔 채 지내고 있던 A의 안부가 염려됐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전 여자친구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적절할지 몰랐다. 어색한 시간이 한참 흘렀다. 끝내 나는 그에게 소송을 취하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게 사실인가?’

SNS에서 ‘데이트폭력’에 대한 폭로가 있은 뒤 나는 한동안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다. 몇몇 사람들은 내게 그와 친하지 않냐 물었다. 그의 폭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답했다. “알량한 친분이 있지요....”

A와 처음 만난 건 2008년이니 꽤 오래된 셈이다. 어느 토론회 자리에서 처음 만난 뒤에 간헐적으로 만나왔다. 나는 그의 글을 즐겨 읽었으니 친구라기 보단 독자에 가까웠다. 그의 글은 어떤 논란과 관련해 양측의 주장과 논거를 정리할 때 특히 탁월함을 보였다. 그가 판단을 미루고 평론만 한다며 불쾌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비판 상대의 논거까지도 최대한 선의를 가지고 분석하는 그의 글이 윤리적이기까지 하다고 느꼈다.

자주 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글이 좋았다. 그러나 역시나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일상이 어떤지 세세히 알 수도 없었다. 만일 폭로가 사실이라면 그는 매일같이 여자친구를 폭행하고선 정치평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그런 그의 글이 윤리적이라고 느꼈던 것인가...?

주위에선 사건 직후부터 판단을 끝낸 사람들이 여러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중 몇몇 말은 나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A 이제 끝났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애 없어도 글 쓸 사람 많아.” 등등.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일이 어떠한 절차도 없이 너무 쉽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내 머릿속엔 질문 하나가 끝없이 떠올랐다. ‘이게 사실인가?’ 물론 나는 이 질문을 쉽사리 던지기가 어려웠다. 이런 질문이 자칫 ‘피해자’의 증언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가해자’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진상을 조사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다른 ‘데이트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 사이에 어떠한 폭력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다행히 노동당이 이 사건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당원이었고,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니 ‘데이트 폭력’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이 정도면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할 역할을 맡기 충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노동당의 부적절한 대처가 이 사건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노동당은 이 사건을 ‘당내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하여 당원 긴급간담회를 열고 반 성폭력 가이드라인을 배포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진상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자중하며 조사에 임하겠다고 밝혔는데, 정작 진상조사를 맡아야 할 노동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 없이 이미 판단을 끝낸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어느 아이가 같은 반 친구더러 내 돈 훔쳤냐고 의심하는데, 담임선생이 앞뒤 사정은 따지지도 않고 돈을 훔치는 건 나쁜 일이라며 학생들에게 훈계하는 격이었다.

누구도 운동의 퇴비로 쓰여선 안 된다

이런 상황은 A에게 가혹했다. ‘알량한 친분’ 때문에 그의 안부가 염려됐다. 그와 만나 소송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사리 만류하지 못했던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그는 조사를 기다리겠다며 사과문을 올려 두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사과문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을 끝내 버렸다. 그가 자중하며 지낸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가 ‘가해’를 저질렀다고 입증하는 증거가 돼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국가의 법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아무런 조사도 없이 ‘가해자’로 확정하는 분위기에 맞서 발언권을 얻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 또한 국가의 법이 참으로 앙상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법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에 충실할 뿐이다. 진보 운동은 성별, 연령, 계급, 지위 등에 따라 권력이 얽히고 설켜 고통을 양산하고 있는 현 체제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운동사회 내의 문제를 소송으로 가져가는 일을 가급적 피해 왔다.

그러나 노동당의 대처 역시 당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사건 직후 “우리 당의 가치와 그동안 지켜 왔던 당내 기풍을 해하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규정한 노동당의 입장표명에서 이미 그러한 태도가 나타났다. 진상조사 없이 규탄만 이어지고 있는 판이었다.

이런 사태에서 나는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었을까? 운동을 생각해서 소송을 취하할 생각이 없냐는 말도 몇 번이나 내뱉을 뻔했다. 그러나 그건 참으로 무책임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 판국에 소송을 하지 말라는 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제3자의 입장에선 이 사태에서 A가 ‘가해’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편이 제일 손쉬운 해결책이다. 어쨌든 ‘가해자’를 규탄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해결책은 가장 끔찍한 일이다.

그 누구도 이처럼 쉽게 운동의 퇴비로 쓰여선 안 된다. ‘가해자’의 친구로서 소송을 만류하지 못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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