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넘어서

(조셉 마터스)

그리스도교가 생겨나고 난 뒤 200년 동안, 신학은 체험에 바탕을 뒀다. 체험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을 언급하기 위해 나중에 여러 용어가 채택되었지만 이것들도 원래는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체험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바오로는 신앙에 의한 의화에 대해 썼는데, 이때 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인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것이 진리라고 믿음으로써 당신의 삶이 올바르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사도행전에서는 세례를 통해 구원받음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세례식이라는 전례를 거침으로써 죄가 씻겨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돌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깊이 잠김으로써 이기심으로부터 구출된다는 뜻이었다.

“12사도의 가르침”(보통 “디다케”로 부른다)과 같은 다른 초기 문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저술들 또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 안에서 체험하고 있던 것을 글로 적으려는 시도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3세기가 되면 사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 문서들의 배경에 있는 체험은 잊혀졌다. 이 문서들은 성경이라고 부르는 귀중품으로 인식되었다. 디다케조차도 일부 초기 성경목록에 보일 정도다.

호교론자로도 불렸던 3세기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그리스도교가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고 의심하던 이교도 세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그중 한 사람인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하는 식사를 이교도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 앞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성전의 희생제사에 비유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하지는 않지만 나름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호교론자들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보다는 하나의 신념체계로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설명들은 체험과의 연결이 없어지고 있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하나의 종교로 단합시키고자 했으므로, 그리스도교를 합법화하고 진작시켰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제국 전역을 자유로이 여행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자기와 다른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와 다른 신학들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을 일치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서로 논쟁하면서 제국을 더 분열시켰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주교들을 니케아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모이도록 명령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문서를 만들어낼 때까지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니케아공의회, 325) 이들은 니케아 신경에 합의했다. 이 문서는 예수처럼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신과 교회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로써 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체적 체험에서 결별하는 첫 단계가 완성되었다.

중세 시대

 

▲ '고해성사', 주세페 크리스피.(1712)

로마 황제들이 제국을 보전하려는 시도들이 실패하고, 5세기가 되자 서방의 절반은 북방에서 내려온 야만인 침입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른바 암흑시대가 10세기까지 이어졌다. 민중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동안, 신학적 사고는 정지에 이르렀다.

반면에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진화하고 번성했다. 정교한 성찬 전례가 미사 형태로 정리되어 당시 유럽대륙에 정착해 가고 있던 (야만인) 부족들에게 신앙을 전하던 선교사들이 집전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아무도 왜 그런지 기억하지 못함에도 희생제사라고 불렸다.

세례는 아기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성인 개종자들은 강에서 치르는 간략한 예식이 되었다. 견진은 주교가 말에 탄 채로 그가 손을 댈 수 있도록 치켜 올려진 아이들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사적 고해성사는 수사들이 도입했는데, 하느님이 용서하셨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던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결혼식은 (공공기록을 하고 보관할 정부기구가 없어 교회에서의 혼인 기록이) 혼인에 관한 공공기록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의식이 되었다. 서품식은 성직자가 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도제들이 일련의 성품을 하나씩 거쳐 승품됨에 따라 치르는 일련의 예식이 되었다. 병자 도유(기름 바르기)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일로 시작되었지만, 현대 의학이 없던 시절에, 사람이 죽기 직전에 하는 종부(終傅) 도유가 되었다.(지금의 병자성사를 예전에는 종부성사라고 했다.)

11세기가 되자, 혼란은 잦아들었다. 기후는 따뜻해졌고 농사가 잘 되었으며 상업이 팽창했고 마을들은 도시로 성장했으며, 대성당들이 지어지고 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대 문서들을 필사하던 수도사들은 그 문서를 연구하는 데로 관심을 돌렸다. 철학과 신학이 부흥되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스콜라 신학자들은 종교적 예식, 특히 성사에 관심을 돌렸다.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는 왜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가?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는 어떻게 효력이 생기는가? 사제와 주교의 권한은 어떻게 다른가? 혼인의 유대는 왜 한 번 맺어지면 풀 수 없는가?

하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많은 신학 언어가 이미 상당히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구원이란 천국에 간다는 뜻이고 성령의 은총은 체험되지 않으며, 죄는 다시 저질러진다 해도 용서된다고 생각했다. 혼인은 해소불가능하고, 사제의 권한은 사제 직무와 연관이 없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의 사람도 종부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제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하물며 이해는 더욱 못하는 단어들을 쓰며 집전하는 미사가, 사람들이 그저 종이 울릴 때에나 주의를 집중하는 그런 미사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보았다.

중세 후반에는 성사 행위가 여러 측면에서 성사적 마술로 퇴보했음에도 교회 지도부는 거듭되는 개혁의 요구를 거부했으며, 마침내 16세기가 되자 유럽의 절반이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에 트리엔트공의회(1545-63)는 성사 제도를 개혁하여, 대부분의 미신적 요소를 없애고, 주교들은 자신의 양떼를 위한 진정한 목자가 되어야 하며 사제들은 신학교에서 양성되어야 한다고 정했다. 16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가톨릭의 성사 실행과 성사 신학은 서로가 서로를 반영했다.

세례와 사제에 관련된 요소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왜 교회를 떠나지 않으며 사제들은 왜 사제 직무를 떠나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성체는 미사에서 현양되었고 성광 안에 안치되어 현시되었으며, 오직 드물게만 영하게 해 주었는데 대개는 사제에게 죄를 성실하게 고백한 뒤에 그랬다.

혼인의 풀 수 없는 유대는 가톨릭 신자들이 왜 이혼하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견진과 병자성사는 눈에 보이는 효과는 없지만 가톨릭인들은 견진성사는 청소년기에 견진성사를 받으면 좋고 병자성사는 죽기 전에 받으면 좋다고 믿었다.

가톨릭교회는 외형과 사고에서 중세 그대로인 채 20세기에 들어섰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진행되고 있는 장면.(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그 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에는 전 세계의 가톨릭 주교들이 모여 교회의 성사 생활을 현대에 맞게 정비할 것을 요청했다. 역사학자들과 전례학자들은 암흑시대 동안 잃어버렸던 미사를 비롯한 여러 예식의 초기 형태를 찾아냈다. 각 민족의 언어로 기도한다든지, 영성체를 빵과 포도주 두 가지로 다 한다든지, 죄와 고해성사의 관계를 재고한다든지, 도유를 병자를 위한 일이었던 맥락에 맞게 다시 정리한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했던 일로, 실천과 신학의 일치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러 가기를 멈추었다. 사제들은 사제직을 떠나기 시작했고 신학생 수는 줄어들었다. 혼인한 가톨릭 신자들은 더 많이 이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혼인무효 소송 판결을 기다리지도 않고 재혼했다.

견진성사의 제1 효과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어릴 적에는 교회에 나가다가 견진을 받는 청소년기에 이르러 나가지 않기 때문) 심지어 세례를 받았어도 그 사람이 계속해서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거나 나아가 (가톨릭은 아니지만 개신교 등으로 가서) 그리스도인으로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되지 않았다. 교회를 떠난 이들이 영지주의자나 무신론자 유대교인 또는 이슬람인이 되고 있었다.

이처럼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뚜렷이 눈에 보이는 데 놀라,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는 전통 교리를 강조하고, 불만세력을 진압하고, 부제들이 병자성사를 집전하도록 허용하거나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성사적 실천에서의 더 이상의 발전을 부인하면서 교회 규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전통적 교리들은 현대인들이 체험한 병이나 죄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 소속감, 혼인과 직무에 대한 그들의 체험과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가톨릭 예배조차도 라틴어 미사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시절에 느껴지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 전에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확신했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을 받기 어렵다.

3세기에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 또 다시 신학과 체험 사이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데, 다만 이번에는 신학이 삶으로부터 2중 분리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미사와 성사에 관한 공식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단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예배 체험과도 단절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사람이 미사와 같은 전례 생활은 자신의 영적 자양분을 얻는 주된 원천이 아닐 뿐 아니라 일주일 생활에서의 정점도 아니라고 느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시절, 에드바르트 스힐러벡스나 카를 라너, 버나드 쿡, 그리고 루이-마리 쇼베 같은 가톨릭 사상가들은 성사를 더욱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글에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식을 통한 예배의 체험을 성찰하는 대신에 교회가 갖고 있던 성사 교리에 대해 성찰했고, 그러한 교리들을 실존주의와 현상학, 심리학, 그리고 종교사회학, 심지어 포스트모던 철학에서 나오는 사유 범주들을 갖고 재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신학자들은 여전히 중세적 교리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결론은 중세 교리와 마찬가지로) 왜 세례는 영구한 것이며 견진을 받으면 영적 힘을 얻고 왜 고해성사가 필요한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도유를 하면 왜 병자에게 도움이 되고 혼인은 왜 불가해소이며 왜 한 번 사제가 되면 영원히 사제인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편집자 주-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개혁과 현대화를 추진했지만 교리 문제를 다뤘던 이전의 공의회들과 달리 기존 교리의 핵심들은 건드리지 않은 채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사목 문제에 초점을 둔, 교회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이른바 “사목 공의회”였다. 즉 개혁파와 보수파의 타협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가톨릭 신자 대부분의 세상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현대의 신학들은 자신들이 대체하고자 바랐던 스콜라 신학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실제 생활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혼란에서 벗어날 길이 있는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교의를 다시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적 상대주의로 폭 빠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양식에 무엇이 긴요한지 재발견하고 그것을 예식 형태로 만들 방안을 재창조해야 하며, 이러한 예식들이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그 가르침에 맞게 살아가는 체험에도 충실하다고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

(조셉 마터스는 성사에 관한 여러 책과 논문을 썼다. 이 글은 그의 연구논문 “성사 신학의 해체와 가톨릭 예식의 재건”(2015)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기사 원문: http://ncronline.org/news/spirituality/twice-removed-why-our-sacraments-often-dont-connect-real-life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