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철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사는 날들입니다. 사순절 들머리에서 추기경님께 문안인사와 함께 간곡한 마음으로 편지를 드립니다.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추기경님이 2012년 5월 10일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것을 축하드리며 그 때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통해서 편지를 드린 인연이 있습니다.(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99 )

불면증의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2012년 5월 이후 채 4년이 안 된 세월 속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연을 품고서 시간의 신은 모든 이들 앞에 공평(!)하게 지나갔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날 이후 세 번째 추기경의 탄생과 교종 프란치스코의 방한 그리고 순교자 124위 시복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변함없이 역동적 갈등 속에서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세월호참사라는 전대미문의 아픔을 앓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의 서울대교구장 취임 뒤 짧고 긴 4년의 세월 속에 국가와 사회적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고 신나게 하는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먹고 사는 일’에서, 어쩌면 ‘기득권 유지’에서 비롯한 고용의 불안이 증폭시키는 경제적, 사회적 갈등과 긴장의 시간이 지속되고 이제는 우리 민족사에서 지워져야 하는 단어, 즉 ‘전쟁’이 눈앞에 다가온 듯 하여 남북을 둘러싼 불면증이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2014년 2월 추기경 서임식에 참석한 직후 로마 한인신학원에서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2013년 개성공단 방문미사를 남북한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고 추진 중이었는데 장성택 실각 이후 연기됐다”고 밝히고, 이어 “지난해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개성공단 신자들의 부탁으로 명동성당 주교관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면서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관할지역인 개성공단을 방문해 남북한 근로자가 함께하는 미사를 드리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2014년 2월 26일 <동아일보>) 이후 추기경님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는지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을 앞둔 2014년 5월 21일 추기경님의 원의대로 개성공단을 직접 방문 하셨습니다. 짧고 아쉬운 당일 일정이었지만 추기경으로서는 북녘 땅을 밟는 첫 모습이어서 정말 감격스러운 하루였습니다. 추기경님이 겸하고 있는 평양교구장 서리로서는 관할 지역이기도해 아마 방문한 느낌이 남달랐을 줄 생각합니다.

▲ 2014년 5월 21일 개성공단을 방문한 염수정 추기경.(사진 출처 = 통일부 UNITV 갈무리)

개성공단은 통일의 탯줄입니다

추기경님은 이날 개성공단을 다녀온 뒤 경의선 남쪽 출입사무소에서 “서울에서 개성공단까지 6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다. 이 짧은 거리를 얼마나 멀게 살고 있는가 하는 걸 많이 느꼈다”라는 말씀에 이어 “선의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하며 진실로 노력한다면 평화가 정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남과 북이 화합하는 개성공단을 방문하면서 아픔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14년 5월 22일 <한겨레>) 추기경님이 개성공단을 직접 방문하고 하신 말씀은 마땅하고 옳은 말씀입니다.

추기경님, 이제 그 개성공업지구가 폐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남북의 유일한 통로이며 통일의 숨길, 통일의 탯줄과 같았던 그 길이 이제 완전히 닫히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새해 벽두 우리 민족은 상존의 길이 아닌 공멸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그리고 ICBM기술로 발사한 위성이 사태를 촉발한 일이지만 그에 맞서는 한국과 미국, 일본의 대응은 칼에 칼로 맞서는 모양새입니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부를 뿐 사태의 해결이 결코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지나간 인류의 역사 안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응징과 정의란 이름으로 가려합니다. 추기경님, 어려운 걸음이지만 이제 나서주셔야 합니다. 모든 이를 제자리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누구도 지니지 못한 권위를 지닌 주님의 사도로서, 종교계의 어른으로서, 한국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나서셔야 합니다.

분단의 고착화는 우리의 십자가 이전에 죄입니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12월 1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민족화해 주교특위 위원인 조환길 대주교, 이기헌 주교, 박현동 아빠스를 비롯한 한국교회 17명이 평양 장충성당을 사목 방문하였습니다. 주교회의는 “대림시기와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이하는 한국 천주교회가 이번 방북을 통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물론 남북 신앙인들 상호 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방문을 통해 주교회의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와 조선 카톨릭교협회는 이후의 활동에 대하여 몇 가지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몸담고 있는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도 남북교회의 합의가 앞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함께 마음 모아 기도했습니다. 추기경님, 이런 일이 모두 물거품 되려 합니다. 다가오는 부활절 평양 장충성당에서 주교회의가 파견하는 성직자가 그곳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이제 모두 끝난 것 같습니다. 이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을 주님 앞에 어떻게 고백해야 합니까?

추기경님, 주님이 맡겨 주신 소임을 행하소서

추기경님, 교회와 사회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목적으로 품으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실지 저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추기경님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운 만큼 주님이 맡겨 주신 소임의 무게도 함께 무겁겠지요. 허나 힘들고 두렵고 무거울수록 세상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이제는 나서셔야 합니다. 남과 북 그리고 덩달아 흥분해서 날뛰는 사람들을 제자리에 앉혀 주십시오. 대화가 참 기적인 줄을 알게 해 주십시오. 대화가 바로 기도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시오. 대화가 사랑의 출발점인 것을 알려주십시오. 추기경님, 존경하고 사랑하는 추기경님, 눈물로서 엎드려 호소합니다. 나서셔야 합니다.

어려운 글이지만 누군가 추기경님께 전해 주시고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자비의 해 사순절을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추기경님께 함께 하길 두 손 모읍니다. 고맙습니다.

 
김유철(스테파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연구대상연구소 대표.
한국작가회의 시인.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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