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철

지난 10월 31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웅천왜성미사의 기사를 접하며 마산교구민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며 글을 적는다.

들어가면서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왜나라 즉 현재의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했다. 정유재란을 포함하여 그것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침략자인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조의 역(전쟁)이라 부른다.

이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싸움에서 얻은 강한 무력과 유럽 상인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새로운 무기를 바탕으로 신흥 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정권의 안전을 도모하려 대륙 침략의 길을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임진왜란이다.

1592년 5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장으로 병선 700여 척이 부산포에 상륙한 뒤 30여 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파죽지세로 유린했다. 알다시피 조선의 임금인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로 도피했다. 이 전쟁을 통해 왜군에게 한민족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았을까? 그것은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왜란이 끝난 뒤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사라진 사실에 대한 슬픔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많은 사상자가 왜군의 이른바 ‘코베기’ 작전으로 코가 떨어져 나간 것에 이르면 할 말을 잊는다. 그러나 기껏 우리에게는 광화문 앞 이순신 동상과 영웅담이 난무하는 대하드라마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지금 마산교구에서는 치욕과 아픔의 흔적인 왜성에서 서양 선교사의 도래에 대한 기념사업이 곰비임비 진행되고 있다. 그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집요하게.

웅천왜성과 세스페데스 신부

웅천왜성은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있는 해발 184미터의 남산 기슭에서 능선을 따라 산봉우리까지 뻗은 석성으로 1985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반도처럼 돌출한 산의 정상부로, 진해 앞바다는 물론이지만 마산과 부산 가덕도, 거제도, 고성까지 한 눈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다.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미터이며, 높이는 대개 2미터 정도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남해안에 쌓은 18개 왜성 가운데 하나이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기지로 활용하였던 곳이다. 왜구를 대비하기 위한 성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개축하여 사용하였다는 점은 두고두고 분한 일이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스페인 사람이며 예수회 선교사다. 그는 1577년 일본에 선교사로 왔다. 당시 일본은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열을 올렸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조선땅 웅천으로 건너와 1년 정도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인 천주교도였다. 항간에 세스페데스를 군종신부라고 부르나 그것은 현대적 해석일 뿐이다. 지난 10월 31일 왜성미사에서 마산교구 총대리 배기현 신부가 언급한 세스페데스 신부의 남겨진 친필 서간문으로 알려진 4통의 편지는 모두 친필 원본도 아니고 전문도 아니다. 그가 보냈다는 편지 일부가 포르투갈어로 번역되거나 이탈리아어로 발췌, 인용되어서 남아 있음을 지난 2006년 심포지엄(마산교구 주최)에서 박철 외국어대학교 총장이 발표했다.

박철 총장은 같은 심포지엄에서 “지금까지 자료만으로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국인들에게 복음사업을 했는지에 관한 직접적인 기술을 충분히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발견된 자료와 편지에 의하면 세스페데스 신부는 단지 일본군의 요새 주위에서만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자료집 58쪽)

세스페데스 신부의 고향인 스페인 알카르데테 주민들은 그가 웅천에 온 지 400주년이 되던 해인 1993년 기념비를 만들어서 진해시에 전달했고 현재의 창원시는 그 기념비를 두어 번 옮겨가며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918번지에 두었다. 사실 이 기념비는 창원시로서는 그렇게 달갑지 않은 조형물이다. 누구라도 선뜻 받고 싶은 기념비도 아니며 설치장소도 애매한 탓에 옮겨 다녔다. 그것으로 이 땅에 온 최초 서양 도래인에 대한 기념은 된 것이다.

▲ 2013년 제5회 미사 현수막.(사진 출처 =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홈페이지)

그러나 마산교구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임진왜란 동안 머물며 한 일을 바탕삼아 웅천왜성을 ‘한국 최초의 사목터로서 성역화’를 꾀했었다. 해마다 이 행사를 알리기 위해 전 본당에 보낸 공문들의 내용은 2009년 ‘성지염원미사’에서 출발하여 2010년 ‘교구평신도대회’를 겸한 미사를 했으며 2011년 드디어 ‘성역화’라는 말을 쓰기 시작해 올해까지 사용했다. 이 공문들은 모두 교구 평협회장과 담당사제인 총대리 신부 명의다. 그러나 올해 미사에서는 산상미사의 의미를 “웅천왜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조선인 포로들의 희생과 조선 복음화에 대한 세스페데스 신부의 원의를 기억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라고 급회전했다니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마산교구의 지속적인 시도

천주교 마산교구는 9년 전인 2006년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아 심포지엄을 진해시민회관(현재의 진해구민회관)에서 개최하였다. 심포지엄의 제목은 ‘세스페데스 신부의 방한과 선교활동’ 이었다. 사실 그 행사는 단순한 학술행사가 아니라 어떤 일의 시발점이었다. 결국 이 일은 ‘한국 최초의 사목터, 웅천왜성 성역화 산상미사’로 이어졌으며 마산교구는 2016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두고 있다.

올해 3월 마산교구청에서는 ‘성지 및 사적지 정비위원회’가 열렸고 웅천왜성 안건이 정식으로 논의되었다. 회의에는 10명의 신부가 참석했고 웅천왜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러나 갑론을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단 한 명의 반대-국민정서상 옳지 않다는 의견-를 제외하면 4명의 신부는 왜성개발 사업에 찬성했고 나머지 5명의 참석자는 관여하지 않았다. 회의에서 나온 말들 중에는 엉뚱하게도 폴란드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며 의미를 두자는 말도 있었고, 이미 이 사업은 20여 년 전부터 알음알음 논의를 했으며 1975년에 왜성 인근의 땅 천여 평을 샀다는 말도 이어졌다. 이어 스페인에서 기증한 세스페데스 신부의 기념비를 왜성 입구로 옮기자는 말과 함께 밀양 명례성지부터 진해, 웅천왜성을 연결하는 순례길에 대한 제안도 있었다. ‘성지 및 사적지 정비위원회’ 신부들에게 역사가 무엇이며, 민족의 치욕과 슬픔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은 7년 전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18년 뒤 1910년 일본에 의한 경술국치까지 이어지는 조선이 멸망하는 전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가면서

차마 이 글에 다 쓰지 못했다.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을 참느라 어금니가 흔들릴 정도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적의 큰 배는 3층 누각을 설치했고 단청은 마치 불전 같았다. 배의 누각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웠으며 깃발마다 흰 글씨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일곱 글자가 씌어 있었다” 라고 왜선을 묘사했지만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깃발은 붉은 비단 휘장에 흰색으로 열십자 무늬를 수놓았는데 그 열십자는 고니시가 신봉하는 야소교의 문양이라는 말에는 천주교인으로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다. 그뿐이랴, 일본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그림이나 하다못해 최근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도 열십자 무늬가 들어간 ‘기리시탄(크리스천)’ 부대의 문양들을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갈무리.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라는 말로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를 시작했다. 그것은 소설가의 멋있는 말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울음이다. 모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인들이란 말처럼 적의 함선마다 싣고 다니다 끝내 바다로 던져진 여인들의 삶과 죽음을 아는가? 전쟁이 끝난 지 400여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을 겁주는 말로 “이비!”라고-이비는 귀와 코를 베어간다는 의미를 지닌 의성어-하는 경상도 말의 어원을 아는가? 왜군의 배에서 노를 젓다가 거북선에 받쳐서 죽는 조선인 노예의 억울함을 상상하는가? 왜성을 쌓아 올리다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고, 돌에 깔려 죽어 간 사람들의 한을 기억조차 하는가?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그리고 그 뼈다귀를 길에 버렸다”라는 유성룡의 징비록 기록을 아는가? “굶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 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라는 눈뜨고 보지 못할 글들을 한번이라도 읽어 보기라도 했던가?

그러나 내심 웅천왜성이 한국천주교회사의 전사로서 서양 선교사가 머물던 곳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밀어 보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 마산교구의 진심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미사에서 주례사제가 말했다는 “웅천왜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조선인 포로들의 희생을 위로”하려면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할 것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또한 과정이야 불문하고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천주교 신부와 그가 한 활동을 기념하고 싶다면 그의 고향인 스페인 천주교회나 그를 불러들인 일본 천주교회 아니면 그를 파견한 예수회가 하면 된다. 허나 그것을 이 땅의 사람들이 나서서 하겠다는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교구민과 지역민과 국민들 생각은 했단 말인가? 임진왜란 동안 코 베이고, 귀 베이고 말로 다하지 못할 치욕을 겪은 이 땅의 후손들이, 그것도 왜성이 있던 지역의 후손들이 그것을 한다는 것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자신이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청맹과니의 일일 뿐이다. 선교사보다 먼저 하느님이 이 땅에 있었음을 새기면서 마산교구의 50주년을 맞고 싶다.

 

 
 

김유철 (스테파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예총 부회장. 저서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천 개의 바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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