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변지영 칼럼을 읽고

성경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 찬 책이다.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만 해도 그렇다. 가난하고 슬퍼하고 박해 받는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니. 예수는 세속의 가치들을 뒤집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교회의 율법도 전복시킨다. 바리사이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두고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뜯는다고 비난하자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일갈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을 전복한다. 그런데도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을 폐기한 뒤에 새롭게 맺어진 신약이라면 이해하기가 쉽겠지만, 예수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새로운 가르침은 옛 율법의 완성이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은 예수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그림에서 천사는 커다란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날개가 뒤로 접힌 채 멀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유대계 사상가 발터 베냐민은 이 그림에서 ‘역사의 천사’를 읽어냈다. 천사는 자신의 앞에 과거의 잔해들이 쌓여가는 것을 응시하면서도 과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뒤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천사는 잔해들을 다시 결합하며 죽은 자들을 되살리고자 하지만 바람에 의해 밀려난다. 그 바람은 천사가 잔해로 다가가기도 전에 미래로 밀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사가 뒤로 밀려나면서도 과거의 잔해들을 끝까지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천사는 과거의 잔해더미를 끝까지 응시하며 잔해 조각들을 다시금 합치고자 애쓴다. 당대의 폭력과 착취가 만들어낸 파국에 의해 불타버린 잔해처럼 쌓이고 쌓이는 희생자들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점에서 역사의 천사를 닮았다. 역사의 천사가 과거의 잔해를 응시하듯이, 예수는 당대의 모순을 지켜봤다. 누군가가 쌓아 둔 곡식 한 톨 없이 안식일에 졸졸 굶고 있는 동안 다른 이는 남의 노동에 기대서 배불리 먹으면서도 남을 힐난하던 고약한 현실이었다. 예수는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이 만들어낸 잔해들이 쌓이고 있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치워 버려야 할 쓰레기로 치부되어 주변부로 밀려나 더러운 존재로 치부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나눠 먹으며 생활했다. 그것이 형식만 남은 율법을 현재로 불러와 완성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 2014년 11월 8일 가톨릭학생운동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시된 한국 가톨릭학생운동의 초창기 역사. ⓒ정현진 기자

회칙과 현실의 괴리

한 주 전 변지영 씨가 쓴 칼럼(‘청년의 세대적 자부심은 어디에서 오나’)을 읽으면서 다시금 역사의 천사를 떠올렸다. 가톨릭학생회의 대학생들이 활동방향을 잡지 못 한 채 그저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닌지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가톨릭학생회의 대학생들이 사회적 문제에 자신 있게 개입하기 위해 정책경쟁을 통해 방향성을 분명하게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학생회의 과거가 남겨 놓은 문제들을 해결해서 미래로 나아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미래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 전에 과거를 조금 더 오래 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톨릭대학생연합회의 방향성은 최근까지 회칙에 비교적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일례로, 2008년 열린 연합회 총회에서 한 회원이 회칙의 실효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사회 복음화 실천 활동을 벌여낸다’는 회칙 조항을 두고 이에 중앙집행부들도 동의하는지 물었다. 회칙에는 이런 조항이 적혀 있지만 연합회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연합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접했으니 회칙과 현실의 괴리를 두고 토론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적절한 토론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연합회에서 일을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친구들도 그간 가톨릭학생회에서 사회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론해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총회에 참석하는 각 학교의 회장들 중 상당수는 동기 중에 할 사람이 없어서 회장을 떠맡은 경우였다. 그런 자리에서 ‘민주화’나 ‘통일’을 가지고 토론하기란 참 어려웠다.

그 당시에 만났던 가톨릭학생회 회원이 연합회 홈페이지에 남겼던 글은 그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가톨릭학생회에 가입한 지 몇 달도 안 되어서 회장까지 맡았다고 했다.

“최근 이래저래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제가 애초에 원하던 성경공부는 온데간데없고...ㅠㅠ 1학기 내에 동아리 살려놓고 가라는 막대한 중책(? ㅠㅠ) 과 함께...가대연...농활...가톨릭학생회... 과연..이것들은 무엇일까요...불과 3개월 전만 해도..저에게는 생각도 못했던 일입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야..? 괜한 거 하고 있는 거 아니야?..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다른 분들은 새내기 과정을 거치고, 여러 가지 거치면서 지금 까지 오셨겠지만..어찌 보면 저는 동아리라는 것도 아직 생소한 사람이고. 심지어..가대연이라는...이것이 동아리 인지...사회단체인지..아니면 연합회 인지..신앙공동체 인지....3개월도 채 못 되는 기간 동안..너무 많은 게..흘러 들어오고 있어서...뭔가 복잡하고 혼란한 기분입니다.”

당시 각 학교 가톨릭학생회들의 사정이 대부분 이렇게 어려웠다. 이런 조건 속에서 연합회의 총회준비를 그저 임시방편으로 할 수는 없었다. 변지영 씨의 이야기와 달리, 총회준비위원회는 집행부를 어떻게든 세우려는 자리가 아니라 예비 집행부들이 각 학교 가톨릭학생회에서 접하지 못했던 방향성 토론을 해볼 수 있도록 돕는 자리였다. 총회준비위원회 동안 인수인계를 받은 예비 집행부들은 전임 집행부를 배제하고 총회준비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총회준비위원회는 임시방편이었다. 각 학교 가톨릭학생회가 살아나야 연합회에서도 보다 분명한 방향성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하면 적어도 성경 한 번 정도는 훑어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니 사회 문제가 있어도 신앙에 기초해 토론해 보기조차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래서 지도수녀님과 함께 성서교재를 만들어 각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배포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미 전례위원회나 성서교재 발간 등을 했다던 이야기를 듣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참조하며 만든 것이었다.

연합회에서 활동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면 예전 선배들이 남긴 문서들을 자주 뒤져 보았다. 지금 뭐가 문제여서 유독 어려워진 것인지 궁금했다. 예전 문서들을 보니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가톨릭학생회는 언제나 위기라고들 했다. 80년대에도 가톨릭 대학생들이 보수적 신앙관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활동가들은 당시를 가톨릭학생회의 위기라고 말했다. 1980년대에는 동아리들이 회원이 없어서 문을 닫을 염려는 안 했을 뿐이다. 각 시대는 각기 다른 양상의 위기에 직면해 왔다.

문제는 구호가 아니라 방법

가톨릭학생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쓰레기로 치부된 삶들이 도처에 널린 시대에 잔뜩 움츠러들기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는 반드시 나아져야만 한다.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의 잔해들을 더더욱 끈질기게 응시해야 한다. 가톨릭학생회에게 지금 필요한 건 ‘통일’이나 ‘자본주의 문제 해결’ 같은 구호를 내건 경선이 아니라 각 학교의 일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험해보고 고민해볼 수 있을 방법들이다. 오랫동안 그러한 방법들을 찾아보고자 애썼던 노력들이 과거의 잔해들로 남아있다. 너무 빨리 미래로 고개를 돌려선 안 되는 이유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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