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04]

참 오랜만에 내가 많이 아팠다. 그동안은 몸이 좀 안 좋다 신호를 보내도 내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들과 산더미 같이 쌓여가는 집안일을 보면 이를 악물고서라도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 나서 따듯한 차를 끓여 마시고 소금물로 입안을 헹구는 등 수선을 떨다 보면 언제 아팠냐는 듯 다시 멀쩡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인지 몸살감기가 제대로 들어 그대로 앓아 누웠다. 잠깐이라도 일어나 활동을 하면 오한이 들고 콧물이 줄줄 쏟아지니 나로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

'에라 모르겠다, 그냥 눕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번데기 고치처럼 이불을 둘러 쓰고 아랫목에 누워 끙끙 앓았다. 아이들이 다가와도 "엄마 아프니까 저리 가서 놀아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밥 준비할 때가 되어도 몸을 일으킬 수도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나무하러 다니느라 뼈골 빠지는 신랑한테 미안하기는 했으나 신랑이 알아서 하겠거니 다 놓아 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갑작스런 부엌데기 자리의 부재. 집안은 순식간에 혼돈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엄마의 단속이 약해진 틈을 타 아이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쑤시고 다니며 온갖 잡동사니들을 끌어내기 시작했고, 부엌은 부엌대로 설거지거리며 아이들이 먹다 남긴 음식 부스러기들로 어지러웠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목격한 우리 신랑, 우선은 아이들 저녁 먹이는 게 급하니 서둘러 밥을 앉히고 불을 땠다. 개밥을 챙겨 주고 설거지를 하고 후닥닥 밥상을 차려내어 아이들과 밥을 먹었다.

반찬은 이웃집에서 가져다 준 김장김치 단 한 가지. 내 속에서는 '밥상 놓는 자리 주변만이라도 좀 치울 것이지 쓰레기통 위에서 밥을 먹는구만'이라든가 '김이라도 굽지 저렇게 성의 없이 아이들을 먹이나' 하는 등의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으나 꾹꾹 눌렀다. 신랑이 아이들을 재우려고 이를 닦이고 세수를 시켰을 때는 다랑이 입 주변에 끈적거리는 이물질이 그대로 들러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가 찼지만 그것도 그냥 모르는 척 눈 감고 말았다. 부엌데기 대타인 신랑이 하는 일이 내 성에 안 차지만 어쩌랴. 당장은 내 몸부터 챙기는 게 우선인 것을. 다 알아서 하겠거니 마음을 푹 놓자며 다짐에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내 몸은 더욱 격렬한 기세로 아팠다. 이웃집 할머니께서 "감기가 임산부 몸은 꿀단지로 안다고 하더랑께. 한 번 들오믄 나갈 생각을 않는디야"라고 하시더니 정말 그 말대로인 건가? 하루 쉬고 나면 거뜬해질 줄로 알았는데 내 몸은 하루 더 파업을 요청하고 있었다.

"몸 좀 어때요?"
"안 괜찮아요."

새벽부터 나의 안부를 확인한 신랑은 이불을 박차고 나가 난로에 불을 지펴 아이들 아침거리로 고구마를 찌고, 안방에도 불을 넣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나가서 나무를 한 짐 해 오고, 점심밥 준비에 분주했다. 박을 썰고, 생들깨를 갈고 하는 걸 보니 박나물로 박나물들깨탕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점심상이 차려지고 오늘은 나도 한술 뜨기로 하고 밥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신랑이 정성껏 해 준 음식이니 박나물들깨탕부터 먹어 볼까? 그런데! 맛이 이상야릇, 뭔가 거시기하다. 간을 아예 안 했는지 박나물의 달큰함이 달큰함으로만 머물러서 심하게 거북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간 안 했어요? 적당히 간을 해야 맛이 어우러지지."
"일부러 심심하게 했는데.... 김장김치가 짜고 매우니까 같이 먹으려고요. 싱거우면 김치랑 같이 먹어 봐요."

그렇게 말하면서 양볼테기가 미어지게 박나물을 입에 넣고 맛있게 냠냠 먹는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박나물엔 손이 가지 않아서 김치 몇 조각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신랑은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밥을 먹었다. 수북이 담겨 있던 박나물들깨탕은 어느새 국물 하나 남김 없이 말끔하게 비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울이 왈,

"아빠는 아빠가 만든 게 가장 맛있나보다. 왜 그러지?"

▲ 대타 부엌데기가 차려낸 밥상. 격식도 없이 난장판인 밥상이지만 보릿국만은 진국이다. 대타 부엌데기의 정성스런 마음도 진국! 아이들도 국에 말아 한 그릇 뚝딱이다. ⓒ정청라

정말 맛있어서 먹은 걸까, 아님 다른 식구들이 안 먹으니까 아까워서 먹은 걸까? 다울이 말대로 자기가 한 음식이 자기 입맛에 가장 잘 맞는 걸까? 참 희한한 사람이다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어느덧 저녁 무렵, 신랑은 이번엔 보릿국을 선보이겠다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낮에 내가 구박을 했음에도 꿋꿋하게 다시 새로운 요리를 준비하는 저 열정을 보라. 보리 순을 씻어서 다듬고, 들깨를 갈고.... 부엌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보이지도 않는지 요리에만 열중하는 그의 뒷모습.... 과연 보릿국은 어떤 맛일까?

이번에는 아예 기대조차 없었기에 난 안 먹겠다 하고 밥상 있는 데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수저를 반듯이 놓는다든지 반찬 몇 가지를 가지런히 놓는다든지 하는 아주 기본적인 격식조차 지켜지지 않은 심란한 밥상을 쳐다보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국 더 줘", "보리가 진짜 맛있어", "아빠도 음식 잘하네" 이런 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그 맛이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진 나도 벌떡 일어나 밥상 앞으로 갔다.

"밥은 말고 국만 한 그릇 줘 봐요."
"국이 아니라 죽처럼 되긴 했는데.... 그래도 한번 먹어 볼래요?"

그러면서 가져다 준 보릿국 한 그릇, 아니 보리시래기들깨죽 한 사발! 다싯국물이고 뭐고 없이 맹물에 보리  순이랑 시래기, 생들깨즙을 잔뜩 넣고 푹 끓여서 된장으로 간을 한 아주 단순한 음식임이 분명한데도 맛이 아주 특별했다. 구수하면서도 살짝 쌉싸래하기도 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맛! 만약 이런 어수선한 밥상이 아니라 한정식집 깔끔한 밥상 위에서 이 맛을 만났더라면 한없이 감탄을 했을 것이다. "와우, 바로 이 맛이야!" 하면서....

하여간 그 깊고 그윽한 맛에 마음 깊이 전율을 느꼈다. 보릿국을 이런 식으로도 끓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배웠다. 그동안 내 음식이 깨지 못한 어떤 격식이나 틀을 한방에 날려 준 음식이라고나 할까? 다 먹고 나니 보약 한 사발을 들이킨 것처럼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듯해서 그걸 다 먹고 땀을 푹 흘리면서 자고 일어나니, 다음날은 몸이 한결 가벼웠다. 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보릿국도 고맙고, 그걸 끓여 가며 내 빈 자리를 채워 준 신랑의 마음은 더욱 고맙고!

이 다음에 혹시라도 누가 아프다면 나도 보릿국을 찐하게 끓여 주는 것으로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 그리고 나도 아주 가끔은 아픈 척하고 드러누워 이 희한한 보릿국을 다시 얻어먹고 싶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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