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02]

달마다 한 번씩 우리 집에서 공부 모임이 열린다. ‘사주팔자와 동의보감’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의역학 모임인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이는 사람들이 다양한 연령대의 기혼 여성이다 보니 공부를 하기에 앞서 함께 밥을 나누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모임에 올 때 다들 반찬 한두 가지씩을 싸 온다. 나는 밥만 하면 된다. 그럼 그것으로 밥상을 차려 내어 밥을 나누게 되는데, 밥 먹기에 앞서 다랑이의 강력한 요청으로 밥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 만약 노래를 부르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노래를 부를 때까지 다랑이가 “밥아 정말”이라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 같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야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밥아 정말 고마워
밥이 돼줘서
우리들도 밥 먹고
착하게 살게
(잘 먹겠습니다. 얼씨구!)

노랫말과 곡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다. 따라하다 보면 절로 흥이 난다. 덕분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흥에 겨운 기분으로 밥상 앞에 앉아 입맛을 다시며 수저를 든다.

각종 나물과 김치, 장아찌 등.... 반찬은 그리 특별할 게 없지만 이렇게 먹는 밥은 언제나 꿀맛이다. 역시 밥은 여럿이 같이 먹어야 제 맛인 법인가. 게다가 여러 사람의 손맛이 어우러져 있으니 일상적이면서도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밥상의 느낌을 맛볼 수가 있다.

당연히 음식을 먹으면서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수가 없다. 콩나물은 어떻게 기르는 게 좋으냐, 장아찌가 맛있는데 양념 비율이 어떻게 되느냐, 비트로는 어떤 요리를 해야 하냐.... 실속 있는 살림 정보가 오고 간다. 음식을 만들기까지의 사연, 에피소드 등을 전해 들으며 부엌데기들만의 공감의 시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어떤 날은 모임원 중 누군가가 두부추어탕이나 냉면 등의 특별 요리를 준비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가족 아닌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 우리를 생각하며 정성을 기울여 음식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먹는 행위가 단순히 배를 채우고 불리는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 가슴이 먼저 따듯하게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상 중에서 가장 훌륭한 상은 누군가가 날 위해 준비한 ‘밥상’이 아닐는지!

▲ 밥상 위에 김밥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김밥을 집어 먹는 손길들이 바쁘네요.ⓒ정청라

지난 10월 모임엔 특별히 김밥 배틀이 열렸다. 내가 셋째 입덧으로 고생하던 중에 김밥 생각이 간절하더라는 얘길 했더니 누군가 공식에서 벗어난 개성 있는 김밥으로 김밥 배틀을 해 보자 제안했던 것이다. 그 제안을 두고 모두들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뭔가 재미있는 놀이거리를 찾은 듯한 기분! 과연 부엌데기들을 위한 재미난 이벤트가 아닌가. 나는 어떤 김밥을 만들지? 다들 어떤 김밥을 만들어 올까? 설렘과 흥분으로 모임을 준비하며 수시로 이런 김밥 저런 김밥을 싸 먹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 내가 준비한 것은 김치 김밥이다. 한평 할머니가 주신 묵은 김치를 살짝 씻어서 물기를 꼭 짜낸 다음, 들기름과 들깨가루를 넣고 볶은 것이다. 그것 딱 한 가지만 넣어 김밥을 돌돌 마니 간단하면서 쌈박한 김치 김밥 탄생! 김밥 마는 것을 도와 준 사촌동생은 과연 이것도 김밥이냐며 의아해졌지만 말이다.

그렇게 준비한 김밥이 큰 접시로 한 가득 쌓이자 배틀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다들 옆구리에 김밥 바구니를 하나씩 끼고 말이다. 과연 어떤 김밥들을 준비했을지 궁금한 마음에 후닥닥 상을 펴고 도시락을 펼쳐 놓았다. 두근두근.... 과연 어떤 맛들이 어떻게 어우러져 있을까?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모인 사람의 숫자 만큼이나 김밥의 세계는 다채로웠다. 찰밥에 깻잎 장아찌를 넣고 만든 단아한 김밥부터 두부와 묵나물, 파프리카, 우엉조림, 수제 단무지 등을 넣어 만든 정성 김밥에, 두부와 달걀을 버무려 속재료로 넣은 고소한 김밥과 사과샐러드에 명란젓까지 넣어 만든 개성 톡톡 김밥까지! 눈알이 빙빙 돌아가게 멋진 맛의 향연이 펼쳐졌다.

때문에 하나씩 맛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밥 노래를 부르는 것마저 잊고 먹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김밥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고 저걸 어찌 다 먹나 걱정 아닌 걱정을 했는데 김밥은 순식간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결국 너무 배가 불러서 김밥이 남긴 남았으나....

공부가 끝나고 먹으니 또 맛이 새로워 금세 접시는 바닥을 보였다. 내가 이렇게 다채로운 김밥의 세계를 거닐어 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어렸을 때 소풍갔을 때? 그 시절만 해도 각자 집에서 엄마가 싸 준 홈메이드 김밥을 싸 오던 때라 도시락마다 김밥 맛이 다 달랐지. 때문에 친구들과 김밥을 바꿔 먹고 나눠 먹던 재미가 얼마나 쏠쏠했던가. 그렇게 그 옛날의 기억까지 새록새록 떠올리며 정말 배부른 하루를 보냈다. 우리 아이들도 먼 훗날엔 풍성했던 김밥배틀의 날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배틀이니까 승부를 가려야 하지 않느냐고? 물론 그래야 하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꽃 중에 가장 예쁜 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딱 하나 고르기가 난감하듯이 단 한 명의 승자는 없었다. 모두 다 특별한 김밥 앞에서 모두 다 훌륭했고, 다 달라서 아름다웠다. 김밥이 이것저것 구애 받지 않고 다양한 속재료를 품고 있어서 그것 자체로 김밥의 덕성을 자랑하듯이, 그날 우리도 서로의 맛을 품고 김밥처럼 어우러졌으니 그것 말고 무얼 더 바라랴.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