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01]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매달 2,4주 수요일에 정청라의 '부엌데기 밥상 통신'이 연재됩니다. '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에 이어 시골의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다시 원고를 맡아 주신 정청라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부엌이 사라지고 있다. 부엌에는 부엌을 지키는 부엌데기가 있어야 하건만 이제는 아무도 부엌데기 역할을 하려고 들지 않아서다. 왜? 허구헌날 젖은 손에, 해도 해도 티도 안 나는 자질구레한 일감이 넘치는 자리, 그 어떤 영예도 칭찬도 없는 낮은 자리가 의미 없다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그 시간에 밖에 나가 돈을 벌면 그럴듯한 대접도 받고 자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밥은 사 먹으면 되지 않는가. 돈만 내면 각종 식당에서 온갖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는데 뭐하러 힘들여 밥을 짓는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남이 차려 준 밥상 앞에서 수저질만 하면 되는데.... 그저 장식용 냉장고 앞을 우아하게 거닐며 즉석조리식품 한 그릇 꺼내 놓고 우아하게 외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그런데 과연 행복한가? 짧은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부엌이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집안 분위기는 꽁꽁 얼고 만다. 음식을 만드느라 재료를 다듬고, 칼질을 하고, 불을 지피고.... 그때야 비로소 집안 가득 온기가 감돌고 부엌을 중심으로 가족이 모인다. 밥을 먹기 전부터 소리와 냄새, 그리고 부엌데기의 몸짓이 벌써 입맛과 호기심을 자극할 테니 말이다. 거기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까지 있다면 더없이 아늑한 풍경이 되리라.

▲ 불이 타오르는 모습은 언제봐도 신비롭다. 생명의 불꽃도 너울너울 함께 살아나는 것 같다. ⓒ정청라

부엌의 중심은 뭐니뭐니 해도 불이다. 부엌이란 말 자체에도 '불이 있는 자리'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질 않는가. 한때는 가스레인지 불꽃이든 장작불 불꽃이든 별다를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불 때서 밥을 지어 먹어 보니 알겠다. 다루기 쉽고 편리한 가스레인지 불꽃이 우리에게서 불이 주는 큰 의미를 앗아갔다는 것을. 불꽃은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생명의 춤 그 자체이고, 날마다 불을 다루는 과정은 내 안의 불꽃과 하나가 되는 일임을....

그러니까 부엌데기 밥상 통신은 부엌의 가치와 의미를 주장하고 싶은 어떤 부엌데기의 떨리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엔 멋모르고 부엌데기 자리에 들어섰는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콧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순간 너무 힘들고 지겨워서 어떻게 피할 수 없을까 몸부림도 쳐 보고, 마침내 진정한 부엌데기의 기쁨을 살짝 맛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외치는 소리라고나 할까?

"유레카! 부엌은 그냥 부엌이 아니고, 부엌데기는 그냥 사람이 아니다! 부엌데기라야 비로소 행복하다!"

남들이 듣기엔 시시껄렁하고 우스운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뭇 진지하다.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말 그대로 '먹고 사는 일'이 말도 못하게 수고롭다는 걸 온몸으로 확인한 뒤로, 그럼에도 '먹고 사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정 없이 결과만 누리고 살면서도 윤기 자르르하게 잘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럼에도 내가 왜 과정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지 끝도 없이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아니지만 한줄기 빛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나카자와 신이치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이란 책에 소개된 '보이지 않는 사람'이란 이야기를 통해서였다.(참고로 이 이야기는 백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신데렐라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의 한 부족이, 자기들 식으로 의미화하는 과정을 거쳐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엌데기. 아궁이 앞을 지키는 것이 일이라 옷은 여기저기 그을려 있고, 온 몸에 검댕이나 재를 묻히고 있는 것은 물론 불에 데인 상처까지 달고 사는 작고 약한 소녀다. 그 소녀가 사는 마을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란 이름의 위대한 사냥꾼이 살고 있는데, 그 사냥꾼이 신붓감을 찾고 있단다. 그 사람은 이름처럼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자신의 누이동생 눈에만 보이는데, 만약 그를 볼 수 있는 아가씨가 있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마을 아가씨들이 너나할 것 없이 찾아가지만 그녀들 눈엔 그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척 떠들어대지만 이내 들키고 만다. 그렇다면 부엌데기는? 신부감이 되겠다고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찾아가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되지만 그녀는 그를 본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사람의 청혼을 받고 혼인식을 위해 목욕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는 몰라 보게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자, 여기까지가 그 이야기의 전부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슷하면서도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엌데기는 화려한 옷차림이나 외모로 신랑감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숨어 있던 능력(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의 능력은 그녀가 부엌데기로 살아왔기에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사람의 아내가 된 뒤로도 불삯을 떠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부엌데기이길 포기할 때 보이지 않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테니.

한편, 신데렐라는 어떨까? 결혼과 동시에 부엌일일랑 하녀들에게 맡기고 제 몸 치장에만 마음을 쓰며 왕비답게 살지 않을까? 자신의 아름다움이 왕자의 사랑을 붙잡은 셈이니 언제까지나 아름다움을 지키려 몸부림을 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신데렐라와 부엌데기의 삶은 이야기가 끝난 뒤부터 더 많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이 걸어가는 삶의 차원부터가 원체 다르니까.

이 이야기를 읽을 당시에 내가 바로 재투성이 검댕 소녀는 아니고 아줌마였다. 날마다 불 앞에서 씨름을 하며 '먹고 사는 일의 만만치 않음'을 온 몸으로 느끼던 때였다. 그러하기에 더욱, 이야기가 주는 위안이 컸다. 마치 부엌데기에게 바치는 영예의 화관 같다고나 할까? 내 진가를 알아봐 주는 소중한 사람에게 큰 선물을 받은 것마냥 들떠서 내가 앉은 자리를 다시 보게 됐다. 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면서....

부엌데기 밥상 통신에는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본 밥상과 음식, 그리고 사람과 생명 이야기가 담기게 될 것이다.(거기에다 부엌데기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삶에 대한 남다른 안목까지 담아 낼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아직은 어설픈 구석이 많은 부엌데기인지라 그 수준과 진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딱 그 수준 만큼 밥상을 차려내 보겠다. 따뜻한 관심으로 함께해 주시길!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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