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시시한 약자를 시시한 강자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반갑고도 마음 아픈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로 본다는 사실 말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우리 노동 현장의 이야기. 그럼에도, 이런 드라마를 본다는 건 어쩌면 ‘송곳’ 방영 이전에는 미처 상상 못했던 일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사실 굉장히 ‘보수적’ 장르다. 시청률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험적인 소재를 다루기보다는, 누구나 다 아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평균치 혹은 보편적 감성에 각별하게 관심을 쏟는 이유다.

아무리 종편이 지상파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해도, <JTBC>에서 드라마 ‘송곳’을 시작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고 노동자 이야기’이고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노동법 강의로 채워지는 작품이다. 물론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 원작이 인기리에 연재 중이긴 하다. 그러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파급 효과가 다르다. 무엇보다, 드라마는 입체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그렇게도 쓰기 불편해하며, 5월 1일 메이데이조차 ‘근로자의 날’이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지어 부르는 나라가 아닌가. 이 드라마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해고가 극히 평범한 단어가 된 탓이다. 저임금 비정규직은 이제 아주 흔해 빠진 말이 됐다. 시청자들도 잘 안다. 그들 자신의 문제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한 시청자는 곧 ‘평범한’ 해고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정부의 소위 노동유연화 정책은 끝을 모르는 채, 사람을 최대한 짧게 싸게 부려 먹을 방법만을 고안해 내고 있다.

드라마 ‘송곳’은 ‘스타’가 아닌 ‘원작’을 충실히 옮기는 쪽을 택했다. 원작의 캐릭터에 부합하는 적임자들을 최대한 배치했고 배우들의 열연이 매회 화제가 됐다. 대사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송곳 같다. 마음에 콕 들어와 박힐 뿐 아니라 무뎌지려는 감각을 후벼 판다. 왜 나를 해고하려 하느냐는 황준철(예성 분)의 항변에 관리직인 허 과장(조재룡 분)은 말한다. “니가 제일 쉬울 거 같았어. 어차피 니네들 다 잘라야 돼. 니들 못 자르면, 나도 잘려.”

▲ '푸르미 마트' 노조(왼쪽)과 사측이 대립하는 장면.(사진 출처 = JTBC 홈페이지)

프랑스에 본사를 둔 ‘푸르미 마트’라는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 누구나 짐작하듯 사실 이것은 2003년의 한국 까르푸 사태에서 소재를 따온 이야기다. 푸르미의 이수인(지현우 분) 과장과 부진 노동상담소의 구고신(안내상 분) 소장이 만나 한국 푸르미에도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저 원칙과 소신 대로 직장을 다니고 싶었을 뿐인 소시민 이수인이,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에 뛰어들고 결국 한국 푸르미 노조위원장까지 떠맡게 되는 험난한 과정들도 너무나 그럴 듯해서 안타까운 리얼 다큐 같은 상황들이다.

구고신은 말한다. “시시한 약자를 시시한 강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은 존재하는 것이다. 사는 건 벌 받는 것도 상 받는 것도 아니며, 우리는 그저 평범할 뿐인데 그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잘리고 해고당하는 건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하다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만성신부전을 앓는 구고신의 이야기도, 그가 투석 없이는 못 견디는 그 몸으로도 숱한 노동자들을 격려해 왔지만 정작 자신의 평생의 트라우마는 어쩌지 못했다는 비밀에 대해서도 가슴이 아리다. 그의 상처는 과거의 고문 기술자를 노 경비원으로 만났을 때 본격적으로 깨어나 그를 완전히 무너뜨릴 듯 휩쓸고 간다.

‘송곳’은 시청하기 편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현장의 이야기다. 땀 흘려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만 하는 세상의 약자들이 그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온 눈물겨운 결과가 ‘노동법’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다. 연대는 그런 이해 속에서 굳건해진다. 극중 구고신은 말한다. “이런 건 유럽처럼 학교에서 가르쳐야지. 법 없을 때도 노조 했어. 그래도 지금은 노동법 공부한다고 잡아가진 않잖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극중 배경도 2003년이다. 그 흔한 스마트폰은커녕 모두가 폴더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는다. 이미 12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래서 정녕 과거가 되긴 했을까. 암담하다. 드라마 ‘송곳’을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과연 ‘시차’라는 게 있었을까. 오히려 차이가 있다면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교묘하고 혹독하고 무자비하다는 것이리라. 심지어 각 노동현장의 ‘보편적’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그 새 완전히 무감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은, 기업이 돈을 벌어도 왜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가의 문제다. 장기불황 속에서 기업들은 흑자 행진을 이어 가고 있다. 매출증가 없는 비용절감에 의한 이익이다. 사람을 점점 더 싸게 더 짧게 부려 먹고 버리는 데서 오는 흑자다. 극 초반에 한국 푸르미 사장 갸스통 앞에서 정민철(김희원 분) 부장은 분연히 외친다. "디스 이즈 코리아 스타일!" 98만 원의 접대비로 수천 만 원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서 자신만만하다. 이 대사를 들으며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이 나라에 희망은 없다’는 선언 같았기 때문이다.

애초 20부작으로 신문기사에도 발표됐건만, 금토드라마 ‘송곳’은 11월 29일 12부작으로 종영됐다. 목숨을 건 이수인의 단식투쟁 덕택이 아니라, 프랑스 본사에서 인사담당자가 방한한 탓으로 사측과 노조는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한다. 해고자 전원복직, 미지급 임금 지급과 ‘손해배상 청구’ 취하, 노조원과 비노조원 모두의 고용보장 등의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진다. 최종회라서 그랬던 것일까. 단어들을 듣는데 그야말로 판타지다.

혼자 ‘인재개발원’으로 좌천된 이수인이 책상에 컴퓨터도 없이 고립당한 뒤 PC방에서 프랑스 본사에 “저는 한국 푸르미 노조위원장 이수인입니다”라는 메일을 보내는 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실제의 진짜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을 것이다. 12회가 마무리가 아니었다 해도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재점화 됐을 것이다. 우리는 안다. 그 이후에 ‘푸르미’가 겪었을 피눈물 나는 시간들을.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결과물을. 그 패배의 과정들을.

드라마에서 ‘꿈’과 ‘환상’만을 원한다면, ‘송곳’은 상당히 불편한 드라마다. 하지만 더 나은 날들에 대한 꿈은 콘텐츠와 시청자가 함께 일궈 가는 것이라 믿는다면, ‘송곳’은 시청자의 동참을 적극 바라는 작품이다.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만일 감옥이라 해도, ‘더 나은’ 감옥을 만들고 싶다”던 이수인의 여정 또한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와 내가 살아가는 피할 수 없는 발밑의 이야기다.

▲ 이수인(지현우 분, 왼쪽)과 구고신(안내상 분).(사진 출처 = JTBC 홈페이지)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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