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지난 가을부터 올해 가뭄은 가혹하다. 가을비가 주중 도심을 촉촉이 적시지만 쩍쩍 갈라진 수원지는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데 4대강의 대형 보는 죽어 가는 녹조를 끌어안은 채 출렁거린다. 목 타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4대강의 오염된 물그릇은 찬란했던 생태계를 비참하게 단순화시켰다. 녹조와 큰빗이끼벌레가 들끓는 강에 죽어 가는 누치와 꾸구리가 이따금 보일 뿐이었는데, 흐름을 멈추고 썩어가는 모래에서 흰수마자는 사라졌다.

예견된 일이었다. 현장을 나오지 않은 대부분의 생태학자는 강의실에서 입을 닫았고, 강 흐름을 연구하는 토목학자는 학생 앞에서 교과서 들추기 민망했을지 모른다. 흐름이 막히는 강은 썩고, 썩으면 생태계가 도륙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정권 최고위층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발언에 숨죽이며 공개된 장소에서 아무런 반론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과 같은 연구 분야에서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정권 최고위층과 코드를 맞춰 왜곡 선동을 내놓아도 모르는 체한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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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농산물이 가진 고유 유전자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획일화시켰다. 황우석 전 교수가 실험했던 줄기세포는 성공 여부가 사실상 불투명하고 성공한다면 더욱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비윤리적 연구라는 것, 그 방면 연구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연구비를 받는 대학의 전문가 중 그 누구도 문제를 삼고 비판하지 않았다. 유사한 연구를 하는 한 학자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는 연구비가 즉각 중단되는 현실을 만나야 했고 결국 전공까지 바꿔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곧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5주년을 맞는다. 내년 3월 11일이다. 그날에서 한 달 보름이 더 지나면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30년을 맞는다. 강력한 리더십의 강요로 쓰나미가 잦았던 지진대 위에 만든 핵발전소였건만 수명을 함부로 연장한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태평양을 오염시켰고, 먹이사슬을 타고 기하급수로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물고기는 사람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한다. 뒤덮은 콘크리트 틈으로 아직도 방사능을 뿜어 내는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하급 연구자의 만류를 억압한 상급자의 고집으로 가동 2년도 못돼 폭발하고 말았다.

지난 10월 23일 대전에서 폐막한 세계과학정상회의에서 채택한 결의문이 역사책 국정화에 대해 문제의식 있을 법한 과학자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으로 채택한 “과학기술 혁신과 미래창조를 위한 우리의 다짐”이라는 제목의 결의문은 정권 핵심에 아부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우리 과학기술 수장들의 자세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너절하고 하나마나한 내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다짐인 “국가 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하고, 과학적 합리적 국정운영을 펼치도록 적극 협조하고 노력할 것” 대목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다.

“과학은 정치의 시녀!” 1995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거셀 때, 시민단체의 거듭된 추궁에 당시 과학기술부 차관이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굴업도는 “흠 없는 단일 응회암이므로 핵폐기장 최적지”라고 뚜렷한 사전 조사 없던 정부는 주장했지만 실측한 결과 지진 흔적이 산재하고 갈라진 틈이 명백했다. 그 사실을 들이밀자 핵폐기물 처분장 결정에 합리성을 잃은 당시 정부는 정치가 결정하면 과학은 그저 합리화에 동원될 따름이라고 실토했던 것인데, 그런 현상은 4대강에서 재현되었고, 우리는 그 피해와 위험에 노출돼 있다.

역사책 국정화 논의도 맥락이 비슷할 텐데, ‘강력한 리더십’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은 GMO를 낳았고 꿀벌을 사라지게 했으며 바나나를 멸종위기로 몰아넣었다. 조류독감이 돌면 유전다양성을 없앤 닭들이 떼로 살처분되는 이유는 기계화다. 하루 100만 마리를 처리하는 자본의 정교한 기계는 오차범위 내에 닭들이 들어와야 한다고 요구한다. 들쭉날쭉하면 기계가 고장나고, 고가의 기계를 고장나게 한 농가는 계약이 취소돼 퇴출되고 말 것이다. 고기용 돼지와 소도 물론이지만 바나나도 꿀벌도 사정이 비슷하다. 어떤 강력한 리더십에 굴종한 과학기술이 빚은 비극이다.

일찍이 토머스 쿤은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는 오직 한 가지이므로 과학이 밝힌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는 폐기해야 한다고 1962년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설파한 것이다. 분명해 보였던 학설은 도전하는 학설과 경합하게 되고, 경합하다 밀리면 새롭게 변하게 된다는 그의 주장은 과거는 물론 현실에 적용된다. 가치중립이라면 과학 교과서는 수정될 필요가 없지만 그런가? 수많은 변수, 상호작용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붙잡을 수 없다. 철두철미한 임상실험으로 안전을 장담했던 의약품 중, 10년이 지나도 부작용이 없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요즘 세간의 명성과 연구비 높낮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과학기술은 순수하기 어렵다. 돈을 지불하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순종하고, 비판을 억압하는 만큼 권력에 아부하는 과학이라면 차라리 ‘청부과학’또는 ‘아부과학’이라고 말해야 타당하리라. 새로 나온 의약품의 효능을 왜곡하고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침소봉대하는 과학기술만이 아니다. 독립과학자의 접근을 차단한 가운데 핵발전소의 안전을 되뇌고 다음 세대를 위한 에너지인 양 만면에 웃음을 짓는 과학기술, 심화되는 지구온난화가 빚는 기상이변과 환경변화에 속수무책인 GMO를 식량부족의 대안인 양 홍보하는 과학기술이 그렇다. 그들이 ‘강력한 리더십’에 충성맹세를 한다.

농업진흥청에서 개발한 유전자 조작 쌀을 산업용으로 심겠다고 다짐하는 가운데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악명을 떨치는 몬산토는 한미FTA를 등에 업고 우리 땅에서 어떤 사업을 준비하려 들까? 거기에 더 끔찍한 하나. 반도체의 한계를 생명산업으로 극복하려는 삼성이 몬산토와 손을 잡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대법원도 무서워하지 않을 기업과 강력한 리더십이 만나 청부과학에 길든 과학기술인들을 거느리면 국정 교과서만 읽어야 할 우리는 어떤 내일을 만나야 하나. 두렵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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