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근대 과학은 협회를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공증하는 제도를 통해 태어났다. 진실은 더 이상 신이 계시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고립된 확신에 의한 것도 아니게 되었다. 동등한 동료시민들에게 타당성을 입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실은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동료시민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공증한다면 어떠한 억압이나 편견 없이 의심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을 함께 신뢰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동등성'과 '개방성'이다. 입증하는 자도, 의심하는 자도, 누구나 서로가 공유하는 일정한 절차를 따라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거나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야만 협회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을 검증하는 학계뿐만 아니라 허구적 진실을 다루는 문단 모두 기본적으로 진실을 공증하는 협회 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논란에서 학계나 문단이 보여 주는 모습에서는 협회다운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맥락 없는 추문

이응준 작가가 온라인매체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를 고발한 이래 ‘문학 권력’의 폐쇄성을 지적하는 비판이 힘을 얻게 됐다. 그런데 <문학동네> 편집위원회는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와 관련해서 몇몇 평론가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묻자 비판자들의 실명을 콕 집어서 비공개좌담에 부르는 식으로 대응했다. '문학 권력'으로 지목된 대형출판사가 사전 조율 없이 비판자들을 일방적으로 비공개좌담에 부르는 건 토론보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일이다. 애초에 표절 논란을 일으킨 작품을 출판했던 <창비>는 신경숙 작가를 두둔하는 입장을 내놓았다가 논란만 키우기도 했다. 대형출판사들의 대응에서 ‘문학 권력’의 폐쇄성이 역설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문단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동안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대신하지도 못했다. 그간 대중매체가 소설가의 창작윤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문화 담당 기자들은 자리에 배치되자마자 기계처럼 책 소개를 해내야 하는데, 경험이나 일손 모두 부족하니 출판사에서 보내 주는 보도 자료를 보고 마감을 '막는' 경우가 허다하다. 책 내용이 아니라 출판사 목소리에 따라 노출도가 좌우되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나날이 대중들의 관심은 문학으로부터 멀어지는데, 대중매체가 문학 담당에 배분하는 자원 역시 대중들의 반응을 따라 줄고만 있다.

이런 판에서 문학 작품 하나하나의 형식과 내용을 따져 보기란 어렵다. 아니, 판 자체가 북극 빙하마냥 녹아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새로운 작품의 의미를 조망하는 평론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이에 "기쁨을 아는 몸"이란 표현만 맥락 없이 추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문단의 무력함을 보여 준다.

▲ 루다의 의자와 표절.(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비슷한 광경은 앞서 역사학계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추문이 그것이다. 이 책은 '위안부' 생존자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고소하면서 주목받았다. 이 책이 논란을 일으키면서 “동지적 관계”, “강간적 매춘” 같은 몇몇 표현들만 유명해져 버렸다. 이재명 성남시장 같은 이들은 박유하 교수를 두고 SNS에 "어쩌다 이런 사람과 하나의 하늘 아래서 숨 쉬게 되었을까"라는 등 인신공격을 연신 해댔다. 이 시장은 박유하 교수를 옹호하는 이들과 논쟁을 하면서 자신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걸 자신 있게 밝혔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냐'는 것이었다.

반면, 몇몇 지식인들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책에 대한 논란을 법정이 아니라 학문의 공론장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비판하려면 사법적 판결로 바로 가는 건 곤란했다. 문제는 학문의 공론장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는 점에 있었다.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들 정도나 읽고, 대중서는 논란이 되면 산발적으로 발표회를 열고 마는 현실이다. 그런데 익명의 심사자들은 심사평으로 “역겹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발표회에서는 나이 어린 학자의 비판을 “예의가 없다”고 정리해 버리기 일쑤다. 이처럼 학문의 공론장이란 게 과연 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위안부' 생존자들의 분노를 마냥 누르기만 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추문을 통해 학계라는 판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을 뿐이다.

녹아내리는 판

최근의 논란들에서 문단이나 학계 같은 판은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의 글에 대해 내용과 방법론을 차근히 따져 묻기 시작할 때서야 비로소 문단이나 학계가 생기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협회 체제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선 누군가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끼리끼리만 돌려 읽고 '주례사 비평'만 하거나, 반대로 아예 읽지도 않고 비난만 하는 현실에서는 몇몇 표현들만 맥락 없이 대중적인 추문만 일으키고 말 뿐이다. 문단도, 학계도, 대중매체도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게임의 규칙이 깨지면서, 진실을 다루는 과정은 점차 비의를 다루는 밀교의 입회식처럼 돼가고 있다. 이토록 생기 없는 게임의 장에서 과연 누가 감히 새로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녹아내리는 판 위에서 진실이 점차 자신을 닫아걸고 있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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