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임기 5년의 절반을 넘겼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을 여섯 번째나 맞다 보니 이제 대통령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하는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에 큰 성과를 거두었고 남북관계에서 유엔 동시가입과 화해협력의 시대를 연 공이 컸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 일당에 대한 역사적 단죄를 이루어 냈고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했으며 금융실명제를 단행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남북관계의 획기적 발전을 이루어 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에 매진했고 권위주의를 타파했으며 인권의 시대를 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율을 인하하고 4대강 사업을 해서 지금껏 욕을 먹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뭘 했는가? 아직 임기 중이기는 하나 현재까지는 별로 한 것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별로 한 것 없이 임기 절반을 넘겼다는 사실에 대해 어쩌면 몇 가지 변명이 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에 꼼짝없이 휘말렸다. 투표 전야에 국정원 댓글녀 시비가 일었고 이후 권은희 수사과장, 채동욱 검찰총장, 윤석렬 수사팀장 등이 잇달아 권력의 횡포에 밀려나면서 사건을 둘러싼 국민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그것은 사법의 영역으로 넘어가서도 여전히 정치의 외풍에 휘청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국가정보원 이미지.(이미지 출처 = 국정원 홈페이지)
국정원 사태가 1년여를 넘어서며 어느 정도 가라앉아 갈 때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처음 이 참사는 당국의 늑장 대처와 몇 가지 의혹으로 이어졌지만 대통령의 7시간과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계가 거론되면서 결국 진상규명과 진상규명의 방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치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어쨌든 이 참사도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국정의 발걸음을 헤매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임기 절반을 별로 한 것 없이 넘기면서 두 개의 사건을 핑계로 삼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나는 여기서 정치라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만약 국정원 사태와 세월호참사가 국정을 추진하는 데에 장애가 됐다면 그런 장애 요인이 없었을 경우 정권은 무엇을 했겠는가? 드문드문 대통령이 의견을 피력한 것을 보면 대략 경제 발전이 아니었겠나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경제 발전은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역대 어느 대통령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심지어 그 내용이나 방향마저도 보수 진보는 막론하고 큰 차이가 없다. 역대 정부의 공적을 보면 오히려 경제 외적인 문제에서 역사적 과제를 찾아서 추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임기 절반인 2년 반 동안 박근혜 정부는 경제라는 일상적 과제를 넘어선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갈 길을 찾았어야 했는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그 과제가 바로 박근혜 정부가 장애 요인이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저 두 사건에서 갈 길을 찾았어야 했다고 본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정말 바람직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었다 한다면 그녀는 무엇보다 우선 국정원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어야 했다. 그것을 유야무야 덮고 넘어갈 어떤 이유도 없었다. 야당은 철저한 수사가 대선불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정도를 잃은 뒤 지속적인 파행만을 보여 주었다. 거짓이 참을 몰아내고 불의가 정의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해 왔다. 아마 양심적인 지식인의 대부분이 바로 이 국정원 사태가 전개되는 기간을 통해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버렸을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야권 주요 인사들이 박근혜 대통령이 그 시점에서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지지율이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라는 발언을 솔직히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장도 트릭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사물을 보는 안목의 한계였고 그녀가 아는 정치의 한계였다. 그녀는 자신의 제한된 안목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기회는 그렇게 달아났다.

그런데 또 한 번의 기회가 다가왔다. 세월호참사였다. 참사를 기회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만약 이 공전의 참사에 임하여 대통령이 국민의 아프고 쓰린 마음을 이해하고 그 중심에 뛰어들어 국민과 유가족들이 원하는 소박한 바람을 진솔한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대통령에게 어떤 위해를 가져왔을까? 그녀 자신의 말처럼 그녀는 여성 대통령이었다. 남성 대통령이 접근할 수 없는 여성 대통령만의 특성이 십분 발휘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상하게 꼬여갔다. 어느 날부터 그녀는 이 모든 사건들을 귀찮아하면서 한시바삐 국민들이 이 사건을 잊어 주기만을 노골적으로 바랐다. 참사도 인간의 일이라 과연 국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바람대로 점점 이 참사를 잊어 갔다. 국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 참사는 남아 이따금 아프게 찔려 오는 죄의식의 진원이 되고 말았다.

▲ 세월호 침몰 장면.(사진 출처 = YTN 뉴스 동영상 갈무리)

대통령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한갓되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이 여섯 번째가 되다보니 어느 한 때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존재는 지금 가물가물 잊혀 가고 있다. 그런 경험은 오늘 모든 영광의 정점에 있는 것 같은 대통령도 가물가물 잊혀 가는 먼 훗날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묘한 역경험을 안겨 주기도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2년 반을 보낸 세월은 또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은 2년 반도 지나게 할 것이다. 이 한갓된 시간 속의 순간순간을 더할 수 없는 진실과 충정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자 사명이다.

별로 한 것 없이 허무하게 보낸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는 실로 국정원 사건과 세월호참사라는 어머어마한 진실의 순간을 보냈다. 그것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정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든 장애 요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이자 시험이자 더 심오한 의미에서 은총이었다. 우리가 그것을 바로 보고 진심으로 다가갈 수만 있었다면 말이다.

불교에는 소홀히 대하고 만 병든 노파가 아미타 부처님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우화가 적잖이 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박대하여 내쫓은 초라한 차림의 거지가 예수님이었다는 식의 우화는 도처에 많다. 세속의 진실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사건을 적당히 호도하고 세월호참사를 귀찮은 일처럼 외면한 자리에서 그 시대의 사명을 발견하고 정치의 과제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년 반이 별 소득없이 흘러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만약 임기 전반부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느끼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임기 후반부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서도 "뭐가 어땠기에?" 한다면 남은 후반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솔직히 별로 기대를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거두지는 않는다. 한 인간이나, 한 정권이나, 한 나라나 회개하고 돌이키는 한 모든 것이 함께 하겠지만 교만에 차서 허상만 쫓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파멸의 허망함 밖에 없을 것이다. 제발 임기 전반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임기 후반에 관한 교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받은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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