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이 기회에 한국 천주교회의 민주화운동에서 꼭 기억해야 할 외국인 사제 시노트(James Sinnott, 한국명 진필세 ) 신부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8월의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는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의 후원회 회장을 맡으며 인혁당 사건 등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악에 대항하여 싸운 몇 안 되는 외국인 선교사였다.

▲ 해임된 동료기자 복직과 자유언론실천을 요구하며 6일째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기자들. 1975년 3월 17일 새벽에 강제 해산되었다. 가운데 외국인이 시노트 신부.(사진 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4년 11월 8일 한국문제 토론을 위해 유엔에 가 있던 김동조 외무장관은 “외국인 성직자들이 포교 등 종교활동이 아닌 국내 정치문제에 간여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입국목적 위반이다.... 이러한 범법행위가 계속될 때에는 이들에 대해 추방령을 내릴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김종필 국무총리는 한국기독실업인회 주최로 열린 국무총리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한 참여를 탈선행위이며 내정 간섭행위라고 규정했다. 김종필이 언급한 그들의 ‘탈선행위’이자 ‘내정간섭행위’는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에 대한 활동과 지원은 3선개헌 무렵 박정희 정권과 박 정권을 지지하던 미국에 항의하는 ‘50인 모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 모임이 월요일마다 정례화되면서 ‘월요모임’으로 정착되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에 대한 지원방법을 찾아 실천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의 상당수는 유신헌법이 공포되기 이전부터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으며 때로는 협박을 당해야 했다. 긴급조치 1, 4호와 민청학련사건 이후 국민적 저항이 커지자 박 정권은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입국과 체류가 가능한 그들의 취약한 조건을 이용하여 그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그리하여 탄압의 첫 케이스로 같은 해 12월 14일 인혁당 사건의 문제점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던 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강제출국을 당하였다.

1975년 3월 25일 박 정권은 “내국인이 외국인이나 외국단체들을 이용하여 국내 혹은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로 확정지었다. 내국인을 위협하여 외국인 성직자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5년 4월 14일 시노트 신부의 체류기간 연장 신청을 법무부가 불허하고 4월 30일까지 한국을 떠나도록 통보했다.

당시 서해 벽지의 섬이었던 백령도와 영종도는 가난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곳이었다. 자발적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10여 년간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하던 시노트 신부는 1974년부터 한국사회의 억압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인권유린 문제에 신앙적 입장에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 조선과 동아투위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을 지원 격려하였으며, 1975년 2월 24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인혁당사건 진상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인혁당 사건의 공동조사를 제의하는 기자회견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받은 이들이 전격 처형된 뒤, 그들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공권력에 의한 폭거를 사진으로 찍어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박 정권의 인권유린에도 미국의 원조가 계속되는 것을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미국의 지지와 지원 없이는 정권유지 자체가 어려웠던 박 정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들에게 시노트 신부는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시노트 신부를 추방하기로 하자 이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천주교회 안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천주교 주교단의 진정서, 메리놀회 한국지부의 항의성명,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성명서와 기도회 등이 잇따랐다.

그가 속해 있던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는 시노트 신부의 추방을 규탄하는 성명서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 가장 약한 사람들, 그리고 누구도 돌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인 양 도맡아 돌보아 주는 일에 헌신하신 시노트 신부님을 추방한다는 것은 선교사업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노트 신부는 4월 30일 한국국민과 동료 사제와 목사들에게 보내는 성명을 남기고 결국 한국을 떠나야 했다. 성명에서 시노트 신부는 “전 세계의 모든 사제와 목사와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도 사랑의 복음을 전하려 할 때면 죄와 여러 가지 형태의 악에 의하여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즉 때로는 고의적인 악에 의해서 도전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자신이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 까닭에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제로서 선교사로서 나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직분 때문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라며 강제출국의 소회를 밝혔다. 박정희 정권이라는 거대하고 ‘고의적인 악’과 그에 저항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소극적인 악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에게 궁극의 하느님 사랑을 전하고 역사에 새기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벽안의 외국인 사제는 자기 나라도 아닌 머나먼 이국 땅 한국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온 몸으로 악과 맞서 싸웠다.

시노트 신부는 강제추방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10여 년이 지난 뒤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2003년에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이듬해인 2004년 10월 “1975년 4월 9일”이란 책을 내 인혁당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했으며, “희생자들의 사형집행은 전 생에서 가장 아프고 슬픈 체험이었다”며 자주 안타까워했다. 그는 2014년 12월 23일 85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안구를 기증한 뒤 그의 유해는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