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유신 선포 이후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 데 이어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북한의 사주에 의하여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며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수사발표를 통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성”되었다며, 민청학련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이란 이름 모두 수사기관이 임의로 만들어 붙인 이름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인혁당 관계자들이 지목됨으로써 이른바 제2차 인혁당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1차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한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 국가 변란을 기획했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격화되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박정희 정권이 궁지에 몰려 있을 때였다. 이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검사가 도저히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세 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던 근원적으로 조작의 성격을 띤 사건이었다. 그런데 박정권은 10년이 지난 뒤 이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희생 제물로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민민청, 통민청 등의 활동을 했던 혁신세력이었지만 이후 중요한 사회적 지위나 활동 없이 평범한 사회생활을 했고,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1974년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던 신직수 중정부장은 1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으며, 수사를 총지휘한 이용택 중정6국장은 당시 5국의 대공과장으로 수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인혁당 사건 공판에서 피고자 도예종 외 12명의 모습.(사진 제공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내란 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23명을 기소하였다. 재판은 민청학련 사건과 철저히 분리된 상태에서 6월 15일부터 시작되어 약 10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인혁당 관련자들에게는 가족면회도 금지되었고 사건조작을 위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재판은 검사의 심문만 있을 뿐 진술 기회도 없이 진행되었고 공판조서조차 날조되어 작성되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를 거쳐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이들이 받은 형량은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 등이었다.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 뒤 수개월 동안 인혁당에 공개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긴급조치 아래의 살벌한 분위기와 극심한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기피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남편들의 억울함과 무죄를 확신하고 이 사건이 박 정권에 의한 조작극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애쓰던 부인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처음엔 구속자가족협의회에서 벌이던 기독교회관 농성조차 참여할 수가 없었다. 또한 부인들은 남편의 구명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되어 육체적, 정신적 폭행을 당해야 했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계속되어 오던 인혁당 가족들의 구명운동이 마침내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와 재야의 일각에서 호응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발언했던 사람들은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특히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인권과 가족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75년 4월 9일 인혁당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던 날 곧바로 강제로 화장하려는 정권에 대항하여 시신을 지키며 거세게 항의했다. 박정희 정권의 비인도적 행위를 낱낱이 공개하는 역할도 도맡았던 시노트 신부는 체류연장을 받지 못해 한국을 떠나야 했다. (시노트 신부 관련 글은 9월 연재 예정)

▲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울고 있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관련된 가족들.(사진 제공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한편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1975년 2월 24일 명동성당에서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 발표하면서’라는 글을 통해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며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며 “공개된 민간법정에서 재판하는 것만이 사건의 해결과 국민의 의혹을 푸는 열쇠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국내외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박 정권은 1975년 2월 17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전원을 석방했지만 인혁당 관련자는 제외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군법회의에서 내려진 중형을 원심 그대로 확정 판결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제단은 성명서를 통해 “의지할 곳 없는 가족들은 언제나 우리 성직자들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들의 공개재판 호소에 서명한 바 있다. 그들의 소원이란 것은 죄가 있으면 달게 받겠으니 제발 공개재판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공개재판을 해 달라는 안타까운 소망이 묵살된 채 사형을 맞이한 사실에 더욱 분노하며 애닯게 생각한다”고 분노를 표시했다.

1975년 4월 9일, 사형선고를 받은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당했다. 시신들은 각각 시차를 두고 한 구씩 인도되었고, 경찰은 이들의 시신을 완력으로 탈취하였다. 시신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함께했던 문정현 신부는 차량에 깔려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하는 몸이 되었다.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은 가족들의 확인도 없이 화장되었다. 사형집행 소식은 이틀이 지난 뒤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사반세기가 지난 1998년 4월 9일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하고, 2002년 9월 12일 대통력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을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역시 2005년 12월 7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두 사건 모두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대형 공안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은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어 2015년 5월 30일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가 확정되었다. 실로 50년 만의 일이었다.

참고자료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약 220여 건의 사료가 소장돼 있다. 중요 사료로는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처음으로 상세히 밝힌 성명서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 발표하면서’(등록번호 : 108139)가 유감스럽게도 일부만 남아 있다. ‘인혁당 조사 결과’(등록번호 : 476278)는 번역물로 문장은 매끄럽지 않으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정보, 사건의 조작성, 시노트 신부의 증언, 사형과 시체탈취 과정, 외국신문 기사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중요 사료다. 인혁당 관련자들의 모습은 ‘8월 인혁당 사건 공판에서 피고자 도예종 등 13명’(등록번호 : 709843)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인혁당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의 ‘"1975년 4월 9일 사법살인" 인혁당재건위사건-재심청구/상고·항소이유서 자료집’(등록번호 : 437195)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재심청구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 가족들의 호소문, 탄원서, 양심선언 등은 매우 소중한 사료다. 인혁당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구명운동을 벌인 린다 존스 등 ‘Monday Night Group’ 의 영문 자료들도 ‘"AND FOR THIS I MUST DIE?"’ (등록번호 : 471750) 등 다수 소장하고 있다.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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