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1987년 한 해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된 해였다. 지난 번 글에도 언급한 것처럼 1987년 6월민주항쟁은 가깝게는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그 계기가 되었다. 즉 이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폭로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 대통령 전두환의 ‘4.13호헌선언’은 장작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고,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은 국민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하였으며, 이들의 분노는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개헌을 위한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연인원 400 - 500만 명 이상의 대중이 참여한 6월민주항쟁은 6월 10일의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를 위한 국민대회’(6.10 국민대회)로부터 노태우의 ‘6.29 선언’까지 20일 동안 거의 전국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 6월 항쟁 중 명동성당 농성 전경.(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아카이브)

6월민주항쟁은 3단계로 나뉜다.

제1단계는 6.10 대회부터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 대회’ 이전까지다. 6월 10일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호소에 호응한 각지의 국민대회와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같이 개최되던 날이었다. 잠실체육관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손을 맞잡고 호헌을 외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전국 각지에서 분출되었다. 국민대회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 아래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력의 한계가 드러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이어 15일까지 전개된 명동성당 농성은 이날의 시위 열기를 지속시키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민정당은 강경 정책을 강행하는 한편으로, 15일에는 4당 대표 회의와 여야 영수 회담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6.10 관련 구속자 석방, 김대중 연금 해제, 민정당의 일방적인 정치 일정 백지화” 등을 전제조건으로 여야 영수의 실질 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 모색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시위가 수그러들 줄 모르자, 민정당은 18일 노태우, 김영삼 회담의 무조건적 추진을 강조하고, ‘4.13호헌선언’을 유지하는 선상에서 개헌 논의 재개 허용 의사를 밝혔다.

6월민주항쟁의 제2단계는 18일 ‘최루탄 추방결의 대회’로부터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6월 18일의 최루탄 추방대회는 6월 9일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연세대생 이한열 사건이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국민운동본부의 결정에 따라 개최된 이날의 대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150여 만 명이 참가하였고, 특히 부산에서는 30-40만 명이 참여하여 경찰이 진압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제 경찰력이 부족한 중소 도시에서는 경찰이 시위를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시위대들은 가두에서 대중 정치집회를 개최하여“호헌 철폐”,“군부독재 타도”,“최루탄 추방”등을 결의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전국에서 총 1487명이 연행되고, 경찰 차량 13대가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다. 6월 19일에도 투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광주에서 가두시위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19일 광주에서는 원각사에서 열린 ‘호헌 철폐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법회’를 마친 후 20일 아침 8시경까지 4만 5000여 명이 참가하여 철야 시위를 벌였다. 20일에는 강원지역까지 시위가 확대되었고, 전국적 시위는 6월 21일까지 지속되었다.

20일 국민운동 본부는 “4.13조치 철회, 6.10 대회 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 석방, 집회·시위·언론의 자유 보장, 최루탄 사용 중지” 등 4개 항을 정부에 촉구하면서, 정부가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민 대중들의 투쟁은 정부 여당은 물론 보수 야당이나 운동 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생적으로 진행되었다.

사태가 긴박해짐에 따라 이제까지 ‘조용한’ 접촉을 모색해 왔던 미국은 공개적으로 한국 사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일에는 레이건의 친서가 전두환에게 전달되었고, 20일에는 국무차관이 방한했으며, 23일에는 한국문제의 실무 책임자인 시거가 급히 내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공개적인 태도는 “군부 개입을 반대하고 한국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민주 발전이 이룩되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24일에는 전두환, 김영삼의 청와대 회담이 이루어졌으나, 4.13조치의 철회만이 확인되었을 뿐 김영삼이 요구한 선택적 국민투표와 직선제 개헌은 수용되지 않았다.

6월민주항쟁의 제3단계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서 6.29선언까지의 기간이다. 5공화국 정권이 4.13조치 철회와 개헌 논의 재개라는 부분적인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국민운동본부와 민주당이 이를 거부한 가운데 개최된 26일의 대회는 이제까지의 범국민 투쟁을 총결산하는 대규모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대회에는 전국 33개 시, 군, 읍에서 180만여 명이 참여했다.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가는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사무직 시민들의 참여는 전두환 정권을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3467명이 연행되었고, 경찰서 2개곳, 파출소 29개곳, 민정당 지구당사 4개곳 등이 투석과 화염병 투척으로 파괴되거나 방화되었다. 파손된 경찰 차량도 수십 대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발표케 하였다. 직선제 개헌이 쟁취되면서 투쟁 열기는 급격히 수그러들었으나, 6월항쟁을 계기로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대투쟁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봇물처럼 전개되는 등 6월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빛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다시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던 6월항쟁 당시의 천주교로 돌아가 본다. 한국 천주교의 중심이자 6월민주항쟁의 메카였던 명동성당.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해지고 빛바랜 그곳에서 28년 전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 ‘6.10 국민대회’에 적극 동참하며”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통해 1. 민정당의 전당대회는 80년대 판 유신의 시작에 불과하고, 2. 현 전두환 정권은 이미 국민의 도덕적 심판을 받았으며, 3.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결성된 국민운동본부와 함께 할 것이고, 4. ‘6.10 국민대회’를 지지하고 적극 동참할 것이며, 5. 국민들에게 깨어 일어나 행동하는 국민이 될 것을 호소했다. 성명서는 “주여, 이 백성을 군사독재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소서”라는 기도로 끝을 맺고 있다.

그들은 6월 15일 저녁 8시 명동성당에서 전국 차원의 기도회를 개최했다. 기도회에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은 “지금은 민주화 성취 위해 부름 받은 때”라는 제목의 강론을 했다.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존중되고,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정의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인간다운 사회건설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지난 6월 10일 민주화를 위한 국민대회 이래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피신하여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초강경책을 쓰면서 최루탄을 성당 구내에 무차별 난사할 때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가 무너지는 위기를 느꼈다”며 정부의 태도를 비난했다. 그는 이어 “우리 선조들의 순교로 이루어진 이 신성한 성역이 무너질 때 국민양심의 보루가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위로 구속된 모든 이들의 석방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기리는 6월 예수성심성월은 전 국민의 열기 속에 뚜렷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인 민주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주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생활 속에 행동하는 부름을 받은 때이고, 이는 곧 십자가의 때이며, 십자가를 지고 민주화를 위한 부름에 응해야 한다”고 강론했다. 이 예언자적인 강론은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우다 쫓기고 내몰린 이들에게 사제들과 수녀들은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고 피난처가 되었다. 그때의 명동성당은 밤샘토론을 하며 나라의 민주화를 논했던 민주주의의 아고라였고 민주화의 성지였다. 교회가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시대적 소명을 다함으로써 실로 어둡고 썩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순결한 곳이었다. 

▲ 시위대가 귀가한 뒤 옥외 미사를 드리고 있는 수녀들. (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아카이브)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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