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천주교 민주화운동의 큰 두 축은 주교회의가 직접 설립한 평신도와 성직자 연합조직인 정의평화위원회와 신부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다. 정평위에 대해서는 후일 기회가 되면 별도로 살피겠지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정평위와 사제단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인적으로 중첩되기도 했다.

사제단의 탄생은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과 연관이 깊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유럽 순방 뒤 귀국하다가 공항에서 납치되다시피 연행되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은 후 명동 성모병원에 감금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혐의는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한 자금제공과 내란선동, 정부전복 등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7월 23일 지학순 주교는 병실에서 빠져나와 병원 마당에서 열리고 있는 원주교구 사제, 수도자, 평신도 500여 명이 모인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회 자리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석방되어 기뻐하는 지학순 주교. 바로 뒤의 안경 쓴 이는 김수환 추기경.(사진 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유신헌법은 국민이 최소한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 인권과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다.
4. 본인에 대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선동은 본인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5. 본인을 재판하겠다는 소위 비상군법회의라는 것은 그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없는 꼭두각시다.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동안 당국에 의해 통제된 신문, 방송, 텔레비전들은 지금도 계속 검찰관의 주장만을 사실처럼 보도하고 있다.”

양심선언 발표 사실에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신부와 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학순 주교를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지학순 주교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을 겪고 기도회를 거듭하면서 사제들은 사회 현실에 깊이 눈을 뜨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종교인이 투옥되고 있는 현실과 박 정권의 폭압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데 전국 사제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8월 10일 지학순 주교에게 15년 구형이 떨어진 가운데 서울대교구 제3년령 사제 각반 대표회의가 열려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작은 모임이 사제단을 탄생시키되는 모체가 되었다.

8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15년 선고를 받은 뒤, 기도회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항상 성당 안과 마당을 가득 채운 기도회 자리는 긴급조치라는 살인적 탄압과 통제 속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알리고 민청학련사건의 진상과 근황, 가족의 호소 등을 알리는 유일한 언로였다. 또한 그곳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사제들이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며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다.

▲ 1989년 문규현 신부 방북과 관련해 구속영장 집행당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박병준, 남국현, 구일모 신부.(사진 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 모인 사제 300여 명은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라는 명칭에 합의하고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세미나가 끝난 24일, 사제단 결성에 합의한 세미나 참석 신부들은 원주 원동성당에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기도회를 가졌다.

이틀 뒤인 9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집전으로 순교찬미기도회를 열고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제1시국선언'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그의 편에 서서 그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미사가 끝난 뒤 사제단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수도자 200여 명, 평신도 10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시위는 사제들에 의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또한 수녀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도, 촛불 가두시위가 이루어진 것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출범 전후 기도회 때마다 배포되었던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에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함께 민청학련의 진상과 관련자들의 근황이 실려 있다. 이후 양심선언은 “양심선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양심선언은 사전 또는 사후에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밝힘으로써 당시의 영장 없는 연행, 체포, 구속,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의해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민주인사들의 진실을 밝히고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제2차 시국선언-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즈음하여'와 '사회정의실천선언'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체제의 탄압에 억눌린 자유와 해방과 진실을” 알리고 정치권력의 비대와 남용을 통제하고 이를 방지하려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집권자와 국민의 상호 의무와 권리를 다시 한 번 각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확신한다”고 선언하며 민중지향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 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선포한다'는 민중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 1995년, 5.18 특별법 제정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구현사제단.(사진 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 뒤 '추도사_최종길 교수와 떠난 모든 형제들을 위해',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 발표하면서', '정부 당국에 묻는다(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성명서-광주,전주 교구 사제들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에 동참하면서', '박 군 고문사망 사건에 대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성명서', '문규현 신부 방북 관련 자료', '고 김기설씨 유서공방사건의 공정한 공개수사를 촉구하며' 등 민주화운동사에서의 주요 사건마다 사제단은 적극적으로 발언했으며, 그 글들은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조차도 신변의 위협을 심각히 느껴야 했던 중요한 사료들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는 사제단 활동에 관한 생생한 자료가 1000여 건 소장되어 있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활동은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현장에서 중요 고비마다 계속되었다. 특히 당시의 폭압정권 아래서 아무도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김지하 구명운동, 인혁당사건 진상조사와 구명운동,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 폭로, 김재규의 박정희시해사건, 5.18광주민중항쟁,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 임수경 방북사건 등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암흑 속의 횃불처럼 어둠을 밝히며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으로 교회는 명실상부한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양심의 보루라 불렸다. 군사정권 시기 수많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속을 마다 않고 시대의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했던 사제단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대 반민주정권과 일부 수구 가톨릭 내부세력에 의한 끊임없는 왜곡과 폄훼와 각종 불이익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한 사명을 다하고 있다.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