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이야기꾼의 첫 번째 의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니 이야기꾼의 유일한 의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좀 뜬금없지만 최근에 본 연극 ‘필로우맨’(The PillowMan, 이인수 연출)의 대사로 시작하겠다. 요즘 내가 들은 가장 강력한 대사였고, 가장 마음을 빼앗긴 이야기였으며, 여전히 생각 중인 어떤 의미를 던져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2003년 런던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연극 ‘필로우맨’은 셰익스피어의 후예라는 극찬을 받고 있는 극작가 마틴 맥도너(Martin McDonagh)가 썼다. 2007년 우리나라에서 초연된 바 있고, 이번엔 극단 노네임시어터에서 만들었다. 여섯 살 이전 어린아이들에게만 나타나 그 애들이 살게 될 ‘끔찍한 미래’를 알려주고, 죽을지 말지를 결정하게 하고는 ‘자살’을 결정한 아이들을 돕는다는 ‘베개 인간’ 필로우맨의 이야기가 뼈대처럼 등장한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400여 편의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지만, 작가인 주인공 카투리안에게 몹시 중요한 이야기다. 실제 극은 ‘필로우맨’의 줄거리에 지배당하는 듯도 하고, 이야기가 사람을 삼키고 잡아먹어 버린 듯한 전개로 흘러간다. 무시무시하고 재밌는 이야기의 세계였다.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는 건 그야말로 이야기의 힘이었다.

사진 제공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작가란 어쩌면 이야기에 홀린 채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혼돈하며 살아가는, 그저 이야기꾼이 되고자 몸부림치다 사라져가는 존재들인 것일까. 카투리안은 살아남는 데는 관심 없지만, 어떻게든 자기 이야기를 남들이 ‘종이 조각’이라고도 하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세상에 남겨질 수 있는지 여부에 작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전혀 엉뚱한 데서 엉뚱한 손에 의해 엉뚱한 이유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작가’ 카투리안은 자신이 쓴 이야기의 내용과 비슷한 기괴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취조실에서 카투리안이 심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가 쓴 작품 속 죽음과 흡사한 엽기적이면서 잔혹한 두 건의 어린이 살해와 한 건의 실종 사건 때문이다. 옆방에는 지능이 떨어지는 카투리안의 형 마이클이 잡혀 와 있다. 형사는 협조하지 않을 경우 1시간 뒤 형제를 사형시키겠다고 예고한다. 여기는 무법을 합법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즉결처분은 보통이다. 카투리안은 사건과 그의 이야기는 연관성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점차 취조가 진행되는 동안 심각한 아동학대로 얼룩진 마이클과 카투리안의 충격적인 어린 시절이 드러난다.

 사진 제공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결국 카투리안이 쓴 '필로우맨' 이야기를 통해 살인사건의 진실, 참혹한 과거와 믿을 수 없는 마법 같은 상상력의 세계를 살고자 했던 ‘이야기꾼’ 형제의 비밀이 밝혀진다. ‘초록 돼지’와 함께 살아서 발견된, 너무나 행복해하는 말 못하는 소녀와 함께. “난 행복했던 적이 없어”라는 슬픈 기억 속에 자라난 형제는, 그들이 함께 겪어 낸 ‘부모의 실험 기간’을 기괴하고 특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바꿔 버린다. 카투리안이 지어내고 마이클이 탐독한 400편이 넘는 이야기들은 그렇게 쓰이고 그렇게 몸을 얻었다.

자신의 죽음은 중요치 않으나 자신의 이야기가 불태워지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자 했던 카투리안. 이야기가 파일로 보존될 50년과,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50년을 맞바꾼 카투리안. 동생의 모든 작품을 낱낱이 읽은, 지능은 낮지만 이야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이해하는 형 마이클은 카투리안에게 말한다. “카투리안, 넌 좋은 작가야.” 형사 반장 투폴스키는 말하자면 이야기와 이야기꾼 사이의 간극, 자신의 몸마저 이야기화 하고 싶었던 카투리안 형제의 진심을 알아주는 것보다 ‘사건 해결’을 택한다. 그리고 카투리안에게 씹어 뱉듯이 말한다. 자신의 잔혹 동화를 실제 범죄로 저질렀다는 죄목을 씌우면서 말이다. “왜 너 같은 새끼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냐?”

이야기란 무엇이며 이야기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참 깊고도 본질적인 이야기를, 그저 재미난 이야기를 둘러 앉아 듣듯이 감상하게 하는 연극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배우의 입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실은 이야기의 가장 적절한 관람 태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떤 시각적 효과도 배제한 채 오직 ‘듣는’ 재미에 홀리게끔 조율한 연출의 섬세함이 좋았다. 작가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작가는 왜 이야기를 쓰는가. 그럼에도 작가는 결국 이야기로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이야기뿐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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