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연재 ‘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취하여 한 때는 많은 나라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으나 ‘제2의 민주화운동’이 필요한 나라로 전락한 지금을 성찰하고 바람직한 내일을 희망하기 위해 과거 7,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한국천주교회의 고통스러웠지만 자랑스런 족적을 연재를 통해 더듬어 본다. 

*오늘부터 매달 첫째 주 수요일에 어수갑 선생님의 ‘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을 시작합니다. 연재를 맡아 주신 어수갑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의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서였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14일 끝내 숨졌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으로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정부는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 1987년 11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열사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김승훈 신부.(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 여당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고, 재야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각계인사 6만 명으로 준비위원이 구성되어 2월 7일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2. 7추모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천주교는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용희)가 주축이 되고 한국정의평화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기도 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전국의 사제들과 신자들을 움직여 전국적으로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다. 이어 사제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5월 4일 명동성당 미사에서는 전국의 단식사제 571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당황한 전두환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

그러나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 기념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 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어 있었던 이부영 동아투위 기자가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같은 동에 구속되어 있던 조한경 경위와 강진경 경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이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되었음을 파악하고 이 사실을 은밀하게 밖으로 알렸다. 그러나 워낙 험악한 시대라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최종 접수된 곳이 사제단이었다. 그리하여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정리하고 교구 홍보국 복사기로 1000여 매를 복사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사제단 성명이 김승훈 신부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자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명의의 이 성명서는 전부 11개의 소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2.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해 짜여 졌고 또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3. 사건의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
4. 검찰은 사건조작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
5. 이 사건 및 범인의 조작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
6.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그 진상이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
7.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에 대한 재판은 공개되어야 한다.
8. 이 사건 조작에 개입한 모든 사람은 처벌되어야 한다.
9. 억울한 죽음은 천추의 한이 된다.
10. 박종철 군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한다.
11. 우리 사회 양심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강민창 치안본부장, 박처원 대공분실처장 등 조직적 범죄를 일삼았던 경찰간부 6명을 추가 구속하였고, 정부는 고문살인사건과 관련하여 국무총리, 부총리, 내무부장관, 재무부장관, 법제처장, 검찰총장 등을 갈아 치웠다. 정권 측으로선 어쩔 수 없이 문책인사를 단행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재야 진영은 5월 23일 ‘박종철 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박종철 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확대개편하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5월 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6·10대회를 박종철 사건 조작규탄뿐 아니라 4·13조치의 철회 및 민주개헌쟁취로 초점을 맞췄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 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6월 9일의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과정에서 연세대학교 재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 6월 10일 서울역 앞 광장에서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로써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6월 항쟁과 천주교의 역할’과 관련한 글은 6월에 다룰 예정이다: 필자)

그로부터 한참 뒤인 2001년 2월 26일 박종철은 망인이 되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이들이 중심이 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2008년 6월 10일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현장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인권보호센터)에 박종철기념관이 개관되어 당시의 신문기사, 박종철 열사의 친필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동편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한편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009년 6월 7일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인 결과, 당시 정부가 안기부, 내무부, 법무부, 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 기관 대책회의를 최소 두 차례 열어 사건을 은폐, 조작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기막힌 일도 있다. 훗날 박종운은 당시 집권당이던 민자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박종철이 죽음으로써 지키려했던 박종운이 뒷날 어떤 길을 걸었는지 그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유월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밀알이 되어 오랜 군부독재정권의 종식을 알리는 6월 항쟁으로 부활했고, 6월 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점이 되었다. 박종철의 죽음과 6월 항쟁을 매개한 중요한 한 축을 한국 천주교에서 맡았다는 사실은 정의를 갈망하던 천주교인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안겨 주었다.

▲ 1988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및 민주영령 추모식장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김승훈 신부.(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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