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2015년 올해는 교회 안에서는 봉헌생활의 해이며, 한반도는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 해의 절반을 훌쩍 넘은 오늘, 올해가 어떠하니 하는 것이 새삼스레 들릴지 모르지만 뭔가 새로운 다짐을 하고 시작하기에 늦지 않은 때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상을 깨우라 하시고, 한반도의 여기저기에서는 통일논단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기에 세상을 깨우기 위한 교회 노력은 얼마 만큼이고 분단과 갈등을 넘어 통일을 향한 발자국은 얼마 만큼의 증거를 남기고 있는가? 끊임없이 쇄신을 외치치만 쇄신은 문자의 유희로만 남아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헌신이 두려운 것은 잃을까봐 겁내기 때문

우리사회에서 사람들이 뭔가에 헌신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헌신이 삶을 바꾸기 때문인 것이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안락함을 누리는 기득권층의 대부분은 익숙한 것을 편안해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면 망가질 것 같은 불안함에 떤다. 먹을 것이 든 호리병에 손을 넣고 먹을 것을 손에 쥐고 손을 뺄 수 없어 안절부절 하는 원숭이처럼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다 목숨을 잃게 되는 것도 모른 채 중요한 것을 놓친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 시대에 군중들이 예수의 길에 동참함을 거둬들인 이유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십 수년 전 어떤 강의에서 여성학자가 1960년대 논제 중의 하나가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도 되는가?”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논제가 그 시대에는 화끈한 이슈였다니.... 그렇다면 변화되지 않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변화되었고 발전했노라 자족할 수는 없겠지만 변화된 것은 사실이다.

변화의 언저리에는 끊임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싸움을 치르는 운동가들이 있어 왔다. 어떤 명분을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앞서가는 훌륭한 본보기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다고 느낄 때도 행동을 계속해 왔다. 한사람이 지쳐서 멈추면 또 다른 사람이 이어서 행동을 했다. 많은 이가 지쳐서 떠나가도, 그럼에도 고독과 싸우며 잊혀져 가는 곳을 지킨다. 그 고독한 헌신들이 모여 시대를 바꾸고 세상을 복음과 평화로 물들인다.

▲ 태양광 집광판을 설치한 집. (사진 출처 = www.flickr.com)

복음에 기반한 변화는 외롭고 힘들더라도 이루어진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며 대체에너지를 위해 일하는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싸움을 치른다. 싸움에서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아 보여도 결국 그들은 에너지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언젠가는 화석연료가 바닥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인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할 것인지 어떤 것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고 나아가야 하는지 매일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닦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품어 주며 식별해야 하는지 진정성 있게 복음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변화는 선택의 문제이기 이전에 시간의 문제다. 외롭고 힘든 싸움을 마주한 예언자들에게 행동방침이라곤 하나밖에 없다.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하신 그분과 함께 동반하며 복음 안에 바로 서는 것이다. 가슴에 귀 기울이며 험난하더라도 희망을 지키는 것이다. 희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방법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동기가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면 과정의 험난함을 이길 수 있는 참을성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뭔가 바꾸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미래를 품고 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희망을 찾아내고 끌어내어 보자! 그곳에서 통일의 세상, 복음의 세상이 싹트고 있다.

 

 
 

이진영 수녀(체칠리아)
사랑의 씨튼수녀회 수녀
인천새터민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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