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박홍기
신영복 선생님은 비극이 아름다운 이유는 정직성과 각성에 있다고 하였다. 가장 낮은 자들의 정직성, 그것은 자기에게 내려진 중압을 어느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받아 안는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견뎌내면서 아름다움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비극의 구조 자체가 미(美), 아름다움이고, 그것의 반대말이 추함이 아니라 모름다움이라고 그는 말한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비극을 예찬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극이나 고통을 마치 만나지 않아야 할 대상으로 보거나 타인의 것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아픔의 출발점이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 54항은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생활 양식을 유지하고자, 또는 이기적인 이 이상을 열광적으로 좇고자, 사람들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펼쳐 왔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기회의 박탈로 좌절된 모든 이의 삶은 우리의 마음에 전혀 와 닿지 못하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큰 아픔과 비극을 견디어 내게 하는 것은 비극의 크기만큼의 대단한 기쁨이 아니라 좁쌀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기쁨 한 자락이다. 작은 기쁨이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살아나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 마치 깜깜한 밤중에 촛불 하나가 어둠을 사라지게 하듯이 희망은 작은 것에서부터 호흡을 시작한다.

예수의 삶이 온몸으로 정직하게 비극적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향하여 갈 수 있었기에 그 길가에서 우리가 희망을 찾는 것과 같다 하겠다. 거룩함은 화려하게 포장되거나 거대한 모습으로 오기보다 소박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스며든다. 작은 기쁨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고, 복음을 마음에 새기고 깨달아서 행동으로 살아갈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이 땅에서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는 작은 기쁨을 선사하고 있는가? 기득권의 안위를 위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15개 나라 세계 여성 평화운동가 30명이 참여한 ‘위민 크로스 DMZ’가 5월 24일 한반도 북쪽에서 비무장지대를 지나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반도 남쪽 땅을 밟았다. 광복, 분단 70년인 올해! 분단의 시대를 끝내고 한반도와 세계에 정의와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다.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긴 외발걸음일지라도 희망이다. 우리 시대의 고난과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변두리의 아픔을 바라보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기억과 저항이 시작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이어져 정의와 평화의 근원을 이룰 것이기에....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2007년 1월 18일 바티칸 주재 외교단 초청 신년하례식 연설에서 “한민족을 화해시키고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는 노력은 주변지역 전체에 혜택을 가져다줄 것이지만 ... 가장 취약한 계층에 돌아갈 인도적 지원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셨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4년 8월 18일 명동성당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강론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한국인이 같은 언어로 말하는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 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하셨다.

교회가 과연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가? 물론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이들, 환자들, 주변인들에게로 가셔서 늘 그들과 함께 머무르셨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는 것, 진정으로 함께 듣고 보기 위해서 함께 머물고 있는가? 진정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는가?
 

 
 

이진영 수녀(체칠리아)
사랑의 씨튼수녀회 수녀
인천새터민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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