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 돌베개, 2015

한국은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는 나라다. 나는 한국사회의 마지막 카스트, 혹은 마지막까지 남을 카스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학벌’일 거라 생각한다. 다른 것과 달리 학벌은 귀속지위가 아닌 대표적 성취지위라 믿기에 많은 사람들은 학벌에 의한 차별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근래 많은 연구와 통계지표들을 통해 이제 ‘개천에서 난 용’은 거의 멸종되었으며, 학벌은 전근대사회의 신분과 같은 강한 폐쇄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도 사람들은 그 환상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지금의 부모세대들이 그 수혜자들이며,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학벌, 즉 교육은 그나마 바늘구멍만큼이라도 열린 신분상승의 마지막 티켓이라고 믿고 싶은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티켓 중 가장 쳐주는 것이 “서울대 학부-미국 유명대학 박사”다.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국부로 모시는 이승만 미국 프리스턴대 박사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래(아직도 사람들은 그를 ‘이 박사’로 부른다.), 일제 해방 뒤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가 미국식으로 세팅되어 운영된 이래, 미국 박사학위는 한국 엘리트 집단의 대표적인 지위재이자 멤버십이 되었다. 특히 영어 강의와 (당연히 영어로 써야 하는) SCI급 논문수가 대학평가의 주요 기준이 된 지금,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한국의 좁은 교수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집단이 됐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사나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이들도 미국대학을 거쳐야만 교수가 되는 데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 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 돌베개, 2015
김종영 교수(그 역시 미국의 명문대학인 일리노이대 박사인)가 쓴 “지배받는 지배자”는 이런 한국인 미국 박사들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인데, 그 말처럼 한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한 이들이 유학을 결심하게 되는 배경과 유학생활. 그리고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 혹은 한국의 대학 및 기업에 자리를 잡는 과정. 현재의 생활과 그 안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다루고 있다. 이 연구는 약 15년에 걸쳐 80명의 유학생을 인터뷰했는데, 사회학자인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과 한국, 두 나라를 오가며 진행한 장기적인 질적 종단연구”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쏟은 많은 시간과 노동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가 뭔가 엄청나게 새로운 것을 밝혀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혹은 쉽게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을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실증과 기록이 중요하므로 이 연구의 의미가 적다고는 할 수 없다) 대신 이 책은 침묵의 카르텔을 맺고 있는 대학이라는 제도권 학문의 성채 안에 나온, 매우 이례적인 내부 고발자의 증언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목적은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들이라는 특정 엘리트 집단의 연구를 넘어, 저자 스스로가 서문의 제목으로 달았듯 위기에 처한 “한국 대학과 지식 공동체의 모순”을 극복하는 데 있다.

이제까지 한번도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미국 유학파 지식인에 대한 분석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학벌사회의 피라미드에서 꼭지점에 위치한 엘리트 지식인 집단의 탄생에 대한 이해로부터 한국 대학과 학계의 모순을 해체하고 그 체제를 재구성하는 단초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고 지식 엘리트들의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드러냄으로써 지식인 계층의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권력 관계 재편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22쪽)

다시 말해, 미국 박사 학위자들에 대한 조사와 분석, 평가가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불완전성 즉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핵심 멤버로 하여 구성되어 있는 한국의 대학과 교수집단의 ‘비루함’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그로부터 건강한 우리의 학문 공동체 재건을 위한 진지한 혹은 절박한 논의가 시작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 미국 유학생들과 학위 취득 후 미국 대학에 자리를 잡은 교수들을 인터뷰하면서 저자는 그들의 입을 통해 혹은 직접, 반복해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들이 어떻게 전 세계 학문세계에 글로벌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 안에는 그들은 그럴만하다는 일정한 동의가 깔려 있는데, 저자가 보기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미국 대학의 삼위일체의 권능은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실력’, 즉 학문이라는 이성의 성과물(로고스), 그리고 지식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는 합리적이고 보편주의적 규범과 윤리(에토스), 연구자 개개인의 학문을 향한 열정과 헌신(파토스)이다. 저자는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는 이 세 영역이 모두 유기적으로 맞물려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데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분석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내,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지식 공동체의 세례를 받고 귀국한 엘리트 집단인 미국 박사들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수혈하는 한국 대학들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그에 대한 매우 서늘한 답을 내놓고 있다.

한국 엘리트들은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엄청난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기보다 이 격차에서 오는 이점을 활용하려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즉 미국 유학을 통해 국내 학위 소지자들과의 문화적, 상징적 간극을 더욱 벌리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코스모폴리턴 구별 짓기’ 전략은 다른 계층이나 집단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사회적 폐쇄다. 무늬로서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은 결국 특정 집단이나 계층을 위한 편협주의로 전락한다.(300쪽)

다소 개념적인 용어를 쓰고 있어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쉽게 말해 ‘지배받는 지배자’인 미국 박사들이 자기 몫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다. 배움 혹은 학문을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이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학문의 본령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진리가 인간을 자유케 하는 일’이라면, 미국 유학파 지식인들은 자신들 학문의 비교우위적 지위를 통해, 그 반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냉정하고 도발적인 진단과 분석을 한 저자가 내놓은 처방은 매우 실망스럽다. 저자는 “한국 대학의 전방위적 개혁은 멀고, 개인의 당면 현실은 가깝다. 한국 대학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극히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어떤 지식인들은 이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301쪽)”라고 말하며 현재 한국의 대학과 교수집단이 얼마나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체인지를 고백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조금씩 특수주의 대신 보편주의적인 실력주의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숙명론적이고 비관적인 전망보다는 냉철하면서도 긍정적인 안목을 가지고 꾸준히 매진하는 것 외에 길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덧붙여 “비록 이곳이 아무리 더럽고 열악하더라도, 아무리 학문의 글로벌 지배가 압도적이더라도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열정은 꺾을 수 없다.(302쪽)”는 격려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은 한국 대학의 개혁을 어느 한 지점이 아닌, 다면적 관점에서 즉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해 입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그것은 굳이 끼워 맞추자면 지식 공동체를 떠받드는 세 위계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와도 조응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교수집단 내부를 향한 용기 있는 문제제기.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려와 미국 유학파 지식인들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으로 규정, 그들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짚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초 목표로 했던 한국의 대학과 지식 공동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혹은 방향제시에서는 그토록 무력한 말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그 한계를 저자가 문제의 보다 깊은 핵심인 학문의 ‘위계성’을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저자는 그것을 전제로 대학과 지식 공동체의 개혁을 말한다. “아카데미아 임문다”(Academia Immunda) ‘학문은 더럽다.’는 뜻으로 저자가 에필로그로 삼은 제목이다.

피라미드 구조인 학문의 세계에서 극히 소수만이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 민주적 이념을 가진 학문의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불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와 초월을 꿈꿀지라도 학문은 어디까지나 ‘세계-내-학문’이다. 지식인은 누구나 자존감이 강하고 사회적 인정을 갈구한다. 이들에게 학문적 배척은 곧 지옥이며 존재 이유의 상실이다. 그러나 이 지옥은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절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학벌, 인용되지 않는 논문, 인정해주지 않는 동료들, 그리고 수여되지 않는 사회적 지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지식인들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학문자본이 미천한 지식인들은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는 곧 지식인은 지식인에 대한 신이자, 지식인에 대한 늑대이기 때문이다.(296쪽)

자못 비장하고 숭고한 자기 고백처럼 읽히지만, 원래 학문의 세계는 피라미드 구조를 갖는 수직적 위계성을 그 본질로 한다는 인식 안에는 모든 학문공동체는 비루해질 수밖에 없는 논리가 내장되어 있다. 저자는 멋진 말로 ‘임문다’ 즉 더럽다고 말했지만, 분명 더러움과 비루함은 다른 것이다.

나는 지방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내 전공에서는 나름 명문이라는 평가를 받는 서울의 한 사립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저자가 인터뷰한 많은 유학생들이 느낀 미국대학의 선진적인 교육 시스템과 실험실, 도서관 등과 같은 연구시설의 우수함, 그에 대한 감동은 나 같은 지방대생들이 상경해 서울 사립대들이 가진 물적 토대의 풍요로움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글로만 만나던 대가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수업을 듣는 일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의 위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본교 출신 대학원생들과의 보이지 않는 벽도 미국유학생들이 느꼈던 고독감, 소외감 같은 것과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공부 밖에 없다는 실력주의의 내면화도 유사한 경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 외 학위 취득 뒤, 미국 박사들이 계속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두 곳을 오가며 전략적 포지셔닝을 하는 이른바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는 것처럼 지방출신으로 서울대나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서 학위를 받은 연구자들도 그 비슷한 생존전략을 취한다.

이 같은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 아닌 ‘트랜스로컬(translocal)’의 차원에서도 학문적 위계에 따른 불평등이 재생산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동일한 로컬 안에서도 지방 국립대와 사립대 사이의 위계가 발생하니, 적어도 대학과 지식 공동체의 개혁이라는 문제에서 이 위계성을 괄호로 묶어 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야심찬 도전과 상상력도 결국 헛수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의 요구대로 “냉철한 분석과 노련한 전략, 집요한 근성”으로 대학의 조직적, 구조적, 문화적 개혁이 성공하여 글로벌 헤게모니를 쥘 수준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학문의 본질이 위계성이니 만큼) 끊임없이 위아래로 수직적 구별짓기를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세계의 비루함은 계속되고 누군가는 영원한 미들맨으로 남아야만 한다.

학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에서 이 위계성은 너무나 자명한 것 같아, 그것을 지워 보자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저자는 버턴 클라크의 연구를 인용하여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미국 대학의 수준은 형편없었고, 그 때문에 유럽인들은 1만여 명의 미국인 유럽 유학생들을 모기떼라 비아냥거렸지만, 미국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독수리로 비상했다.’며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301쪽) 결국 저자는 위계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나쁜 것도 아니니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의 미국 대학의 학문적 위계까지 올라가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나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의지를 가진 실력 있고 건강한, 학문적 보편주의를 수호하는 연구자들이 우리의 대학과 지식 공동체에 주류로 자리 잡길 바란다. 그러나 대신 프랑스 68혁명의 교훈은 어떤가? 당시 시위대가 내걸었던 유명한 구호 중 하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였다. 68혁명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실존하는 모든 유형의 권위와 차별에 반대한다는 극단적 저항운동이었다. 시위대의 젊은이들은 진보적인 기성세대들조차 그건 어쩔 수 없는 차별이라고 생각하던, 혹은 차별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했던 문제들을 정치화하여 그것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그들은 대학의 위계를 부정했다. 엄연히 실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옳지 않으니 혹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없애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혁명은 실패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모든 국공립대학들은 서열을 없앤다는 취지로 이름을 모두 파리 1대학에서 13대학까지로 바꿔 버렸다. 이러한 형식적 변화가 얼마나 본질적인 위계성을 극복했는지, 그리고 프랑스 지식 공동체의 수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저자가 표현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도전이란 우리가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대체 혹은 거기에 필적하자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대담하고, 야심찬 그리고 아름다운 그래서 한번 해 볼 만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똑같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라면, 난 좀 더 큰 싸움에 배팅해 보고 싶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이 땅의 선학들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이는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 중 하나다”(302쪽)라고 말한다. 우리의 학문전통에서 최고의 지성 중 한명으로 꼽을 수 있을 다산 정약용은 몇백 년 전에 이미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비록 현실과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선배 학인들은 진정한 학문은 타인을 의식하고 경쟁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온전히 자신으로 소구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믿었다. 이런 말들이 ‘이미 파탄 난 한국 대학의 시스템과 문화’(이건 저자가 다른 지면에서 한 인터뷰에서 한 표현이다.) 앞에서 너무 한가하고 낭만적인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시 제목처럼 ‘이탈한 자가 문득’ 던지는 짧지만 캄캄한 하늘에 잠시, 반짝 긋는 별똥별 같은 생각이라 해도 좋겠다. 저자의 말대로 학문은 더럽다. 그러나 그 더러움이 학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꾹꾹 눌러 쓴다. “한국의 대학과 지식 공동체의 재건을 위하여!”
 

고윤수 씨의 서평은 이번 달로 마무리됩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서평을 연재해 주신 고윤수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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